✒️ 긴 생각 짧은 글/3. 나의 살던 고향은
아련한 기억들 - 3. 그 때는 라디오 시대
무딘펜 bluntpen
2008. 9. 4. 11:13
요즘은 세상돌아가는 소식을 주로 신문이나 TV를 통하여 알게 되지만 70년대까지만해도 주로 라디오를 통하여 바깥소식을 접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집집마다 대개 한 대씩 가지고 있는 라디오는 소중한 재산목록이었다.
특히 내가 살던 시골에는 신문이라고는 가끔 서울에서 오는 물건의 포장지로나 볼 수 있거나, 아니면 도배를 위하여 특별히 구하지 않으면 찾아보기 어려웠고, TV도 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겨우 보급이 되었기 때문에 라디오의 소중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70년대 초반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건전지(이 녀석을 우리는 후래쉬약이라고 불렀다.)를 이용하여 전원을 공급하였기 때문에 자주 라디오를 켤 수도 없었으며, 듣지도 않으면서 라디오를 켜두면 어머님의 잔소리를 감수해야만 했다.
우리집에도 처음에는 덩치가 산만한 진공관 라디오가 한 대 있었는데 어떻게 그 안에서 소리가 날까 정말 궁금했었다.
그래서 두꺼운 나무판자로 짠 케이스의 뒷 뚜껑을 열면 소리가 나는 커다란 스피커가 눈에 띄었는데 스피커 뒤에는 자석이 붙어 있어서 나는 자석과 소리가 무슨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곤 했지만 국민학생의 과학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원리를 설명해 줄 아무도 없었다. 하여튼 심심할 때면 그 자석에다 쇠붙이를 붙여보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 라디오는 주로 아버지 차지였는데 담배건조를 위해 밤중에도 수시로 일어나서 건조실 아궁이에 갈탄을 넣으셔야 했기에 항상 라디오를 켜놓고 심심함을 달래시거나 시계 대신 시간을 확인하는 용도로 사용하곤 하셨다.
그 이후에 요즘의 소형 라디오와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나름대로 자그맣고 예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샀는데 그 때의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요 아래의 라디오는 우리집에 있던 것이랑 똑같다.)

라디오는 재미와 교양뿐만 아니라 시계대신 시간을 알려주는 파수꾼 역할을 단단히 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TV방송은 오후 6시부터 시작하여 12시경이면 끝이났기 때문에 요즘처럼 아침에 TV를 볼 수는 없었다.
대신 학교가기 전에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곤 했는데 매일 아참 7시 50분이면 "즐거운 우리집"이라는 단막극을 들려주곤 했다. '즐거운 우리집' 은 할아버지.할머니, 아버지.어머니, 아이들 등 삼대가 한 집에 살면서 가족간에 그리고 이웃과 함께 생활 속에서 빚어내는 사랑과 웃음, 감동과 교훈을 담은 홈드라마였다. (확인해 보니 박서림씨가 극본을 썼다고 하네요)
그런데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그 단막극의 주제가인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나눕시다 명랑하게
일년 삼백 육십 오일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어도
우리집은 언제나 웃으며 산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12시 55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김삿갓의 북한 방랑기라는 프로그램인데 주로 삿갓아저씨가 북한을 돌아다니면서 공산당의 횡포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이것 역시 정부의 철저한 반공교육의 일환이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 프로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은 '눈물젖은 두만강'의 앞부분을 딴 것인데 이 음악만 들으면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눈물젖은 두만강을 들으면 갑자기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든다.
저녁 무렵에는 7시 40분 무렵에 라디오 연속극을 들려 주었는데 농한기에는 새끼를 꼬거나 가족이나 동네사람끼리 고구마를 나눠 먹으며 연속극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동네 아주머님들 중에 몇 분은 스토리에 심취하셔서 슬픈 얘기가 나오면 눈물을 흘리거나 나쁜 사람에 대해서는 서로 성토의 목소리를 높이시곤 하셨다.
초기에는 주로 콩쥐팥쥐나 장화홍련전 같은 옛날 이야기를 각색해서 들려 주는 경우가 많았고 그 이후에는 창작극도 들려 주었던 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제목 하나는 "겉보리 서말"이라는 연속극이다.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않는다'는 옛말과 관련시켜 볼 때 아마도 처가살이하는 능력은 없지만 착한 아저씨 얘기가 아닐까 싶다.
라디오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기상통보를 들려 주는 것이었다. 농사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들려주는 기상통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시골사람들의 일과 중의 하나였다.
지금 내 기억에도 생생한 것은 가끔씩 새벽에 눈을 뜨면 들려오곤 하던 새벽 4시에 하는 김동완씨의 그날 첫 기상통보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민방공 훈련시 라디오에서 하는 스타일과 비슷한 말투때문에 인상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자정이 넘으면 대북용으로 여겨지는 방송을 많이 들려줬다는 점이다. 역시 반공시대의 산물이다.
내가 라디오를 들으며 가장 감격했던 사건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몽고선수를 이기고 레슬링에서 건국이후 첫 금메달을 땄던 사건을 라디오에서 알려 줄 때였다.

요즘이야 올림픽 금메달이 아주 흔한 사건이라서 몇몇 인기종목을 제외하고는 누가 땄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 당시는 정말 대단한 사건으로 간주되었다.
당시에 나는 담배건조실에서 어머니를 도와 담배를 꿰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규방송이 중단되면서 긴급뉴스로 그 경사를 알려 주었다. “국민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한국의 양정모 선수가 마침내 금메달을 땄습니다.” 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기쁨의 멘트를 날리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하다.
이제는 TV에 밀려 매니아층을 제외하고는 듣는 사람이 부쩍 줄어버린 라디오. 그러나 시청하기 위해서는 눈과 귀를 온통 뺏겨 버리는 TV에 비하여 라디오는 다른 일들을 하면서도 귀만 열어놓으면 되기 때문에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며, 특히 요즘 TV방송의 자극적인 내용으로 비교육적이라는 지적이 많은 점에 비해서 그 시절 라디오는 재미와 교양을 두루 갖춘 훌륭한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내가 살던 시골에는 신문이라고는 가끔 서울에서 오는 물건의 포장지로나 볼 수 있거나, 아니면 도배를 위하여 특별히 구하지 않으면 찾아보기 어려웠고, TV도 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겨우 보급이 되었기 때문에 라디오의 소중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70년대 초반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건전지(이 녀석을 우리는 후래쉬약이라고 불렀다.)를 이용하여 전원을 공급하였기 때문에 자주 라디오를 켤 수도 없었으며, 듣지도 않으면서 라디오를 켜두면 어머님의 잔소리를 감수해야만 했다.
우리집에도 처음에는 덩치가 산만한 진공관 라디오가 한 대 있었는데 어떻게 그 안에서 소리가 날까 정말 궁금했었다.
그래서 두꺼운 나무판자로 짠 케이스의 뒷 뚜껑을 열면 소리가 나는 커다란 스피커가 눈에 띄었는데 스피커 뒤에는 자석이 붙어 있어서 나는 자석과 소리가 무슨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곤 했지만 국민학생의 과학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원리를 설명해 줄 아무도 없었다. 하여튼 심심할 때면 그 자석에다 쇠붙이를 붙여보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 라디오는 주로 아버지 차지였는데 담배건조를 위해 밤중에도 수시로 일어나서 건조실 아궁이에 갈탄을 넣으셔야 했기에 항상 라디오를 켜놓고 심심함을 달래시거나 시계 대신 시간을 확인하는 용도로 사용하곤 하셨다.
그 이후에 요즘의 소형 라디오와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나름대로 자그맣고 예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샀는데 그 때의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요 아래의 라디오는 우리집에 있던 것이랑 똑같다.)

라디오는 재미와 교양뿐만 아니라 시계대신 시간을 알려주는 파수꾼 역할을 단단히 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TV방송은 오후 6시부터 시작하여 12시경이면 끝이났기 때문에 요즘처럼 아침에 TV를 볼 수는 없었다.
대신 학교가기 전에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곤 했는데 매일 아참 7시 50분이면 "즐거운 우리집"이라는 단막극을 들려주곤 했다. '즐거운 우리집' 은 할아버지.할머니, 아버지.어머니, 아이들 등 삼대가 한 집에 살면서 가족간에 그리고 이웃과 함께 생활 속에서 빚어내는 사랑과 웃음, 감동과 교훈을 담은 홈드라마였다. (확인해 보니 박서림씨가 극본을 썼다고 하네요)
그런데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그 단막극의 주제가인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나눕시다 명랑하게
일년 삼백 육십 오일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어도
우리집은 언제나 웃으며 산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12시 55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김삿갓의 북한 방랑기라는 프로그램인데 주로 삿갓아저씨가 북한을 돌아다니면서 공산당의 횡포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이것 역시 정부의 철저한 반공교육의 일환이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 프로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은 '눈물젖은 두만강'의 앞부분을 딴 것인데 이 음악만 들으면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눈물젖은 두만강을 들으면 갑자기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든다.
저녁 무렵에는 7시 40분 무렵에 라디오 연속극을 들려 주었는데 농한기에는 새끼를 꼬거나 가족이나 동네사람끼리 고구마를 나눠 먹으며 연속극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동네 아주머님들 중에 몇 분은 스토리에 심취하셔서 슬픈 얘기가 나오면 눈물을 흘리거나 나쁜 사람에 대해서는 서로 성토의 목소리를 높이시곤 하셨다.
초기에는 주로 콩쥐팥쥐나 장화홍련전 같은 옛날 이야기를 각색해서 들려 주는 경우가 많았고 그 이후에는 창작극도 들려 주었던 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제목 하나는 "겉보리 서말"이라는 연속극이다.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않는다'는 옛말과 관련시켜 볼 때 아마도 처가살이하는 능력은 없지만 착한 아저씨 얘기가 아닐까 싶다.
라디오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기상통보를 들려 주는 것이었다. 농사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들려주는 기상통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시골사람들의 일과 중의 하나였다.
지금 내 기억에도 생생한 것은 가끔씩 새벽에 눈을 뜨면 들려오곤 하던 새벽 4시에 하는 김동완씨의 그날 첫 기상통보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민방공 훈련시 라디오에서 하는 스타일과 비슷한 말투때문에 인상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자정이 넘으면 대북용으로 여겨지는 방송을 많이 들려줬다는 점이다. 역시 반공시대의 산물이다.
내가 라디오를 들으며 가장 감격했던 사건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몽고선수를 이기고 레슬링에서 건국이후 첫 금메달을 땄던 사건을 라디오에서 알려 줄 때였다.

요즘이야 올림픽 금메달이 아주 흔한 사건이라서 몇몇 인기종목을 제외하고는 누가 땄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 당시는 정말 대단한 사건으로 간주되었다.
당시에 나는 담배건조실에서 어머니를 도와 담배를 꿰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규방송이 중단되면서 긴급뉴스로 그 경사를 알려 주었다. “국민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한국의 양정모 선수가 마침내 금메달을 땄습니다.” 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기쁨의 멘트를 날리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하다.
이제는 TV에 밀려 매니아층을 제외하고는 듣는 사람이 부쩍 줄어버린 라디오. 그러나 시청하기 위해서는 눈과 귀를 온통 뺏겨 버리는 TV에 비하여 라디오는 다른 일들을 하면서도 귀만 열어놓으면 되기 때문에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며, 특히 요즘 TV방송의 자극적인 내용으로 비교육적이라는 지적이 많은 점에 비해서 그 시절 라디오는 재미와 교양을 두루 갖춘 훌륭한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