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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의 살던 고향은

080922 가부시끼라는 말을 아십니까?

by 무딘펜 2008. 9. 22.

나 어릴 적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고 어른들이 자주 쓰는 일본어를 따라서 쓰곤 했다. 그 중의 대표적인 말이 '가부시끼'인데, 점잖은 우리말(한자어)로 하면 '추렴' 정도가 될려나?

 바쁜 농사철을 지나고 나서 찬바람이 솔솔부는 계절이 되어 얼추 가을걷이까지 끝내고 나면 이른 바 농한기가 된다. 그러면 동네 어른들은 개울바닥을 뒤져 물고기를 잡아 한 솥 가득 민물 매운탕을 끓이거나, 뒷집의 통통하게 살진 암탉 몇 마리를 잡아서 함께 거나하게 술 한잔을 걸치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럴 때 그 비용은 참여하는 사람들이 일정액씩 걷어서 충당하곤 했는데, 이런 경우를 '가부시끼'라고 했다. 근래 들어 젊은 축이 많이 쓰는 말로는 '1/n'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고, 유식한 외국어를 끌어대자면 'Dutch-Pay'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1/n은 총비용을 전체 인원수로 나누어 똑같이 낸다는 점에서, 또 Dutch-pay는 자기가 먹은 만큼만 낸다는 점에서 가부시끼와는 차이가 난다.내가 직접 참여하진 않아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내 기억에 어른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액수가 일정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해 볼 때 아마도 여유있는 사람은 많이, 그렇지 못한 사람은 형편이 닿는대로 걷어서 일을 꾸미지 않았나 싶다.

 이것이 현재의 도시나 외국의 인심과 크게 다른 우리 시골만의 인심이 아니겠는가? 절대적이고 엄격한 의미의 평등이 아니라 사람마다 형편을 고려하여 적용되는 고무줄 잣대, 그 상대적인 평등이 오히려 공평하다고 우리 동네사람들은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 말이고, 또 일제의 잔재라고 해서 쓰기에 껄끄럽긴 하지만 가부시끼라는 말이 그 어려운 한자어 추렴이나, Dutch-pay, 1/n이라는 이상한 용어보다 훨씬 정이 간다.

 그 시절에 시골 갱변(시냇가)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가부시끼하여 대병소주를 사다 놓고, 그동안 농사지으며 쌓인 피로나 서로간의 섭한 감정들을 훌훌 털어버리고는 한바탕 옛가락으로 화합하시던 힘세고 호탕하셨던 동네 어른들. 가뭄에 콩 나듯 가끔 고향동네를 방문하면 그 어른들 중 대부분이 돌아가셔서 고향 뒷산에서 휑한 마을 풍경을 아쉬운 듯 내려보고 계시고, 남아계시는 분들도 구부정한 허리를 힘겹게 펴시고 가까이 다가오셔서야 겨우 내 얼굴을 알아보시는 모습을 보면 정말 세월의 무상함이 섭섭하다. /끝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