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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생각 짧은 글/1. 유쾌한 백수생활

따뜻한 자리끼

by 무딘펜 bluntpen 2025. 2. 24.


■ 겨울이 끝나가는 무렵에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서 장거리 걷기 대회에 참가했다. 대한체육진흥회에서 주관하는 3.1절 기념 무박 120km 걷기대회.

평소에 걷기와 여행을 즐기는 나였기에 나름 걷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120km는 부담스러웠다. 더구나 계속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겨우 내내 책을 한 권 출간해 보자고 체육복 차림으로 방안에서만 푹 절어 있다가 120km 걷기라니! 쉽지는 않은 도전과제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지만 목표했던 책의 출간도 거의 마무리되고 이제 기지개를 켜듯이 뭔가를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걷기 아닌가? 좀 무리해서라도 참가를 덜컥 해버렸다.

■ 결과는 초죽음이었다. 간신히 24시간 이내에 골인은 했다. 처음 출전치고 참가자 중 10번째로 들어왔으니 나름 준수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준비없이 걸은 120km는 애초부터 예정된 지옥의 행군이었다. 처음에는 기세좋게 걸었지만 60km 이후부터는 허벅지에 근육이 뭉쳐서 잠시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근육이 말을 안듣는 바람에 쉴 수가 없었다. 24시간 가까이를 내쳐 걸은 셈이다. 2월의 밤날씨는 제법 무섭다. 주최측에서 나누어 준 물병의 물이 얼어서 겨우 짜서 냉수를 마시는 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평소에 신던 신발인데도 20시간 이상 내쳐 걸으니 내 경등산화의 뒷부분에 탈이 생겼다. 뒷꿈치를 갉아먹기 시작하더니 90km를 지나니 피부가 벗겨지고 피와 진물이 흐르는 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신발을 벗을 수는 없다. 이 추위에 신발을 벗었다가는 나는 아마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참고서 걸었다. 골인지점 15km를 남기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신발을 벗어보니 예상대로 피가 질질 흐른다. 포기할까 말까 망설였다.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한 것이 예비로 가져간 양말을 한겹 더 신어서 신발과 상처 사이를 좀 벌려놓는 것이었다. 이러고도 안되면 그냥 포기하자. 그리고 트레킹 폴을 꺼내서 지팡이삼아 짚고 걸었다. 그냥 걷는 건 괜찮은데 속도가 느려지니 온 몸이 춥고 떨린다. 빠른 속도로 걸을 때는 그나마 체온이 올라가서 견딜 수 있었는데, 마지막 코스인 청계천은 뼈가 시릴 정도로 찬 골바람으로 유명한 곳이다. 아, 춥다. 약간 눈물도 났다.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걸었다. 정신없이.

간신히 골인을 했다. 완보증을 챙기고 설설 기듯이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왔다. 멀쩡해 뵈는 사람이 배낭을 메고, 등산스틱에 매달려 설설기는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이상해 보였을 것이지만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한 마디로 ‘죽겠다.’


■ 집에 오자 마자 씻지도 못하고 자리에 누웠다. 딸아이가 걱정이 되는지 몇 번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본다. 괜찮다고 했다. 자고 나면 곧 나아지리라고.
새벽녘에 눈을 떴다. 목이 말랐다. 그런데 온 몸이 바스라지듯이 아파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머리맡의 전등을 켜고 보니 바로 옆에 누군가 컵과 함께 주전자에 물을 떠다 놓은 게 아닌가. 한 모금 들이키니 그야말로 감로수다. 아, 살 것 같다, 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이걸 누가 갖다 놨을까?

■ 아침에 일어나서 물어보니 작은 딸이다. 아빠가 제대로 거동도 못하고 오랫동안 걷고 왔으니 갈증도 심할텐데 밤에 목이 마르면 물 먹으러 나오기 힘들 것 같아서 머리맡에 물을 떠다 두었단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런 짓(?)을 하다니! 이젠 진짜 어엿한 어른이구나. 잘 컸구나. 알아서 잘 살겠구나, 싶다.

고맙다. 아니, 물보다 더 고마운 건 우리 딸이 남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을 곱게 키워 왔다는 점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