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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생각 짧은 글/2. 비스듬히 세상 보기

좌충우돌 촌놈의 영국 유학기(10)

by 무딘펜 bluntpen 2008. 9. 4.


<Friday, 30/01/2004>
  아침운동을 마치고는 곧바로 어제 저녁에 운전연습을 했던 2차선 도로로 다시 차를 몰고 나갔다. 아직 날이 완전히 새지는 않았지만 시야는 야간운전보다는 훨씬 좋았다. 날씨도 상쾌하고 새벽공기가 신선하여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운전을 하였다. 이제는 차가 조금씩 길이 들어가는 것 같다. 아니면 내가 차에 길들여 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속 40마일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한바퀴를 도니까 35분 정도 걸렸다.  돌아와서 보니 정확히 아침식사시간이다. 

 오전 수업 전에 글로리아를 만났다. 어제 운전 연습한 얘기를 했더니 너무 위험하다고 걱정을 한다. 오전의 Keith 수업은 자기 나라에 누가 관광차 간다면 어떤 곳을 추천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서울과 경주와 제주도를 간단히 소개하였는데 막상 알아듣게 설명하려고 하니 내가 우리나라에 대하여 너무 아는 것이 적다는 생각이 든다. 유학생들에게 사전 교육을 시킬 때 영문으로 우리나라의 간단한 역사, 환경, 관광자원, 자랑거리 등에 대하여 소개를 해주는 책자를 배포하는 것도 상당히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Sue는 오늘도 역시 엄청나게 많은 숙제를 내 주었다. 다른 강사들은 별로 숙제가 없는데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30분 정도는 시간을 내야 할 분량의 숙제를 내 주곤 한다. 그런데 이런 점에 불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 그녀는 10명이 넘는 학생들이 제출한 숙제를 일일이 평가하여 그 다음시간에 개인별로 돌려주니 학생들이 투자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이 시간을 뺏기는 셈이다. 오히려 나는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아무래도 은행에 가서 계좌를 열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Swindon의 Town Centre를 혼자서 찾아갈 자신이 없다. 그래서 폴란드 애인 Dorota에게 물어 보았더니 자기가 Swindon에서 차를 가지고 다니므로 잘 안다고 한다.  Town Centre까지 차를 안내해 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문제가 없다고 한다. 다만 Dorota는 짐바브웨에서 온 Violet을 항상 태우고 다니는데 그 애를 집에 내려다 줘야 한단다. 문제 없다고 했다. 내가 뒤를 따라가다가 그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Violet도 오늘 Town Centre에 갈 일이 있는데 잠시 집에 들렀다 가야 한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자 마자 점심식사는 생략하고 곧바로 Dorota의 차 뒤를 따라 붙었다. Sainsbury를 지나 Swindon 시내에 들어서자 마자 Violet이 살고 있는 집이 나왔다. 그녀는 이곳에서 Part-time으로 노인네들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어서 영어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일단 Violet이 여기서 내렸다. 나는 Violet이 다시 나오면 Dorota가 그녀를 태우고서 Town Centre까지 나를 인도해 줄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Dorota의 차가 출발하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아마 Violet이 Town Centre에 가지 않기로 했거니 생각하고 Dorota의 차를 바싹 붙어서 따라갔다. 그러나 이 애는 전혀 나를 고려하지 않고 마구 달아나듯이 달리는 것 아닌가? Round about를 두 개 거치고 나니 도저히 내 실력으로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한 참을 찾아 헤메다 포기하고 돌아  오려니까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를 도대체 모르겠다.

할 수 없이 도로 옆의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차에서 막 내리는 중년 부인에게 Town Centre의 위치를 물었다. 그녀도 정확히는 모르고 대체적인 방향만 가르쳐 주었다. 일단은 그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한참을 돌다보니 Town Centre로 가는 도로 표지판이 보였다. 열심히 달리다 보니 예전에 배중령과 왔던 곳이 기억났다. 그 길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운전을 하면서 몇 번 욕을 얻어 먹고 간신히 Town Centre에 도착했다. 먼젓번에 왔던 주차장에는 딱 하나밖에 자리가 없는데 내 실력으로 주차하기에는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대 여섯 번을 전후진을 거듭한 끝에 전진 주차를 하였다. 다행히 옆의 차를 긁는 불상사는 없었다.  

곧바로 HSBC로 갔다. 데스크에는 먼젓번에 있던 아가씨와 다른 나이 든 여자가 앉아있었다. 용건을 말하고 여권과 Admission Letter를 보여주였다. 그런데 금방 해줄 생각은 않고 뭔가를 열심히 지껄인다.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 “Pardon?”도 한 두 번이지 두 손을 들고 “I don't understand." 몇 번을 설명하다가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종이에 써서 준다. 내용인 즉 슨 RMCS에서 내가 그 학교에 다니게 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Confirming Letter를 한 장 써오라는 것이었다. 저번과는 말이 달라서 좀 짜증이 났지만 어차피 영국에서 외국인이 은행계좌를 여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그냥 물러 나왔다.

이제 돌아갈 일이 걱정이다. 하지만 어차피 한 시간 동안 주차는 할 수 있는 것이고 30분 정도 시간이 남았기에 Town Centre나 한 번 둘러 보기로 하였다. 은행문을 막 나서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왠 흑인 여자가 아는 체를 하면서 뛰어온다. Violet이다. 오늘 여기 오는 것을 취소한 줄 알았는데 왠 일이지? 그녀는 내게 다가와서 뭐라고 한참 얘기를 한다. 내가 Listening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영국사람이 발음하는 것은 대강 알아 듣는 수준은 되었는데 짐바브웨 여자 말하는 것은 도대체 못 알아 먹겠다.

하여튼 대충 눈치로 때려 잡으니, 왜 자기를 Pick up 하기로 해놓고 도망쳤느냐는 내용이다. 심각한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Violet의 얘기는 Dorota는 자기 집 앞까지만 나를 Escort하고 자기 집으로 갔고 Violet이 잠깐 집에 들렀다가 내 차를 타고 Town Centre에 오기로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오잉! 내가 이해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아직 영어 실력이 딸리니 내가 실수한 것으로 간주하는 수밖에.

하여튼 그녀는 나를 만나서 반가웠던가보다. 엄청나게 친한 척을 한다. 그녀를 데리고 근처의 전자제품 판매코너에 가서 먼젓번에 보아두었던 128M짜리 메모리를 하나 샀다. 49파운드니까 10만원 돈이다. 내 노트북에는 A 드라이브가 장착되어 있지 않아서 간단한 파일 이동이나 복사를 할 때 CD-RW를 이용하기도 뭣하고 하여 하나 구입하였다. 한국에서는 이정도 돈이면 256M를 살 수 있는데  좀 비싸다. 그래도 필요하니 어쩔 수 없이 구입했다.

다음은 Violet이 은행에 잠시 들러 돈을 찾아야 한다길래 동행을 해주고 Tesco에 가서 일주일 동안 일용할 양식을 사는 것을 도와주었다. 도와 준다는 얘기가 별 것 아니고 장바구니를 들어 주었다는 의미다. 어느새 3시 가까이 되었다. 2시 전에 주차를 하였으니 잘못하다가는 딱지 끊기고 80파운드 물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전혀 바쁜 게 없는 가보다. 뭐라고 얘기하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혼자 끙끙 앓으며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쇼핑이 끝나고 내 차 있는 곳에 갔더니 15분 정도 늦었는데 다행히 문제는 없었다.

내 차에 최초로 다른 사람을 태우는 순간이다. 내가 며칠 전부터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여 상당히 서툰데 겁나지 않느냐고 했더니 나를 믿는단다. 후후... 주차시킬 때 좁은 틈새로 간신히 전진주차를 했기 때문에 빠져 나오려면 후진을 해야 한다. Violet이 뒤를 봐주고 서너번 만에 간신히 차를 뺐다. 돌아오는 길은  길은 저번에 배중령과 같이 왔던 길로 향했다. 그런데 그만 첫 번째 Round about에서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우회전을 하고 말았다. 방향이 틀린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다른 방향으로 가는 심정은 초보운전시절을 겪은 분들은 아마 알 것이다. 더구나 옆에 손님까지 태우고 있는데...

그러나 Violet에게 상황을 설명해 봤자 전혀 도움 될 것도 없다. 그래서 그냥 한참을 돌고 돌다 겨우 Shrivenham으로 오는 A420번 도로 표지판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돌아왔다. 나는 운전에 신경쓰랴 도로 표지판 찾으랴 정신이 없는데 이 태평한 여자는 혼자서 주절 주절 열심히 떠든다. 대충 알아들은 몇 마디는 나이가 28살이고 애인과 둘이서 영국에 왔는데 자신은 노인들은 돌보는 Part-time job을 가지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있고, 애인은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애인이 대학을 마치면 그 때 결혼할 예정이란다. 누가 물어 봤어? 누가 물어 봤냐고-?

Violet을 무사히 집앞에 내려 주고 Shrivenham으로 향했다. 약간의 차선 위반으로 역시 다른 차들에게 실례를 범한 것 외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기숙사에 도착하니 5시가 다 되었다. 일단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달리기를 하였다. 샤워를 하고 나니 다시 오른발목이 근질근질하다. 저녁식사는 7시니까 한시간만 연습을 하기로 하고 일단 차를 몰고 어제 저녁에 돌았던 코스를 다시 돌아보았다. 이제는 전혀 문제가 없다. 시속 50마일 정도로 달리면서 백미러로 뒷차를 확인하는 여유도 생겼다. 이제 조금씩 자신이 생긴다.

저녁식사 후에 배중령한테 전화를 했더니 마침 전화를 받았다. 놀러 오라고 한다. 어제 저녁에 사두었던 Wine을 꺼내어 차에 싣고 얼른 달려갔다. 그리고 글로리아와 셋이서 한잔씩 하면서 운전연습 얘기로 꽃을 피웠다. 출발 하기 전에는 소주도 많이 마시고 맥주도 상당히 마셨는데 여기서는 와인 몇 잔에 은근히 취기기 오른다. 뒤끝도 깨끗하고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 앞으로 주종을 이것으로 바꾸는 것을 적극 검토하여야겠다.

아홉시 경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간 취기가 올랐지만 운전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차를 놔두고 내일 아침에 가지러 올까도 생각했지만 여기는 음주측정 같은 것은 없다고 하니까 그냥 몰고 가기로 했다. 거리도 얼마 되지 않으니 문제는 없었다. 이로써 운전을 시작한 이래 첫 음주운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빗길운전, 빙판운전, 음주운전까지 운전하면서 위험하다고 하는 것은 다 해본 것 같다. 운전은 습관이라고 하는데 술 마시고 나서 운전대를 잡기 시작하면 취한 상태에서도 그냥 생각없이 운전대를 잡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앞으로는 절대 음주운전을 말아야겠다. 술을 마실 가능성이 있는 자리에서 아예 차를 몰고 가질 않는 것이 현명하겠다.

 

<Saturday, 31/01/2004>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주5일 근무제가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근무하고 있을 때에는 한 달에 4주차 토요일만 쉬고 그 시간을 메꾸기 위해 월요일은 30분 일찍 출근 30분 늦게 퇴근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 내가 돌아갈 무렵이면 완전히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되어 있으리라 기대된다. 여기는 무조건 토요일은 쉬는 날이다. 그래서 오늘은 수업도 없다.

오늘은 배중령과 Outlet으로 쇼핑을 가기로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10시 경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배중령 댁 큰 아이들 셋은 Wantage라는 곳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토요일마다 참석을 하는데 Gloria가 애들을 데리고 가곤 한다. 오중령 댁 둘째 딸인 예원이는 첼로를 배우고 있고, 배중령 댁 큰 딸 지성이는 바이올린을, 아들인 명성이는 드럼을 연주한다. 학교에서도 가끔 특별활동시간에 악기를 배우고 이렇게 토요일마다 비슷비슷한 실력의 아이들이 모여서 연주하는 법도 배우고 때때로 연주회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어느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악기도 장만하고 과외나 학원을 통하여 연주하는 것도 배울 수 있는데 여기는 음악이 생활화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배중령과 막내딸인 효성이와 함께 내 차로 가기로 했다. 나도 이제 어느정도 주행에는 자신이 붙어 있지만 어린 아이가 타고 가는 차라서 운전을 사양했고 배중령이 차를 몰고 Swindon에 있는 Outlet으로 갔다. 이곳에서 오늘 이곳 영국에 유학와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소령 한분을 만나기로 했다고 하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는 상태라 우리끼리 일단 전체적으로 한 번 둘러보면서 맘에 드는 물건을 점찍어 두었다. 물건값이 그리 비싼 편은 아니라고 하지만 대부분 쓸만한 옷들은 30파운드를 넘어서기 때문에 선뜻 지갑에 손이 가질 않았다.

둘러보는 사이에 어느새 11시가 되었고 그 때 김익현 소령과 그 가족이 도착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김소령은 New Hampton이라는 곳에서 OR박사과정 중이라고 한다. 거의 내 또래 나이가 되어 보인다. 가족들은 부인과 딸, 아들이 하나씩이다. 굉장히 인상이 좋고 서글서글한 성품으로 보인다.

이 곳 물건이나 시세에 대해서는 배중령이 가장 잘 알고 있고 이미 내게는 두 번이나 안내를 해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배중령이 김소령 가족을 안내하기로 하고 나는 아까 돌면서 찍어 두었던 물건 위주로 한바퀴를 돌면서 물건을 구입하기로 했다. 첫 번째는 이곳이 비가 많이 오는 관계로 방수가 되는 잠바가 하나 꼭 필요할 것 같다. Goretex가 가장 맘에는 들었지만 100파운드가 조금 넘는 가격이라 좀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그 정도 품질은 안되지만 Tog라는 등산용품 전문 브랜드에서 만든 튼튼한 잠바를 하나 샀다. 눈 속에서 조난이 되어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다고 선전을 한다. 어깨 부근에는 조난시에 상공에서 헬기가 쉽게 조난자를 발견할 수 있도록 적외선을 자동으로 발생시키는 장치가 부착되어 있는 거창한 옷이다. 56파운드 가치는 있어 보인다. 색상은 평상시에 입어도 튀지 않는 약간 어두운 색으로 골랐다.

다음은 Casual하게 입을 수 있는 셔츠 종류가 필요할 것 같아서 둘러 보는데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랄프로렌으로 가서 스포츠 T셔츠를 샀다. 구김도 거의 없고 무난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아 두 벌을 한꺼번에 장만하였다. 가격도 15파운드 우리 돈으로 3만원 정도니까 적당하다는 생각이다.

다음은 아까 보아 둔 양복을 파는 곳으로 갔다.  제일 작은 Small 사이즈가 내게는 맞아 보였다. 다행히 상의는 거의 맞춤 수준이다. 가격도 70파운드, 옷감이 상당히 비싸 보여서 그리 바가지를 쓰는 기분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지였다. 상의에 맞는 바지의 허리 싸이즈가 28인치 밖에 없단다. 내가 지금 31정도를 입으니까 도저히 불가능하다. 기형적으로 굵은 내 허벅지 사이즈가 28을 감당하기에는 무리다. 눈물을 머금고 그냥 돌아나오니 벌써 다시 만날 약속 시간이 다 되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니 아직 김소령 팀은 쇼핑에 흠뻑 빠져 있다. 쇼핑백을 세 개나 가득 채우고 아직도 열심히 사고 있다. 김소령 얘기로는 영국에서 이 정도 제품을 이 정도 싼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곳이 흔치 않아서 이왕 온 김에 맘먹고 듬뿍 사가기로 했단다. 옆에 따라 다니면서 쇼핑하는 것을 구경했다.

어느새 오후 1시가 다 되었다. 배중령 가족들은 집에 돌아 있을 시간이다. 급히 서둘러서 돌아와 보니 Gloria가 이미 점심식사 준비까지 마쳐놓은 상태다. 김소령 가족이 영국에서는 먹기 힘든 것이라면서 잡채를 맛있게 만들어 왔고 배중령 댁에서는 돼지고기 수육 종류를 준비했다. 둘 다 너무 맛있었다. 이제 2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기숙사에서 느끼한 영국식 식사로 때우다 갑자기 한국음식을 먹게 되는 너무 맛이 있었다. 조금 눈치가 보이지만 과감하게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식사를 하면서 와인을 한잔씩 하였다.

김소령은 정말 입담이 좋다. 뭐든지 얘기하면 척척박사처럼 얘기가 술술 흘러 나온다. 특히 부인과 만나서 결혼하게 된 사연은 너무 재미있게 표현을 한다. 원래 둘은 같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학교 다닐 때는 서로 얼굴만 알고 지내는 정도 사이일 뿐 별로 끌린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소령이 사관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부모님이 면회를 오셔서 같이 얘기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미팅을 하는 동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 방 동료의 파트너로 바로 지금 부인이 나왔는데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정말 예쁘게 변해 있었단다. 그래서 부모님을 보내고 다시 들어가서 자기 동료한테 사실 파트너가 내 고등학교 동창인데 오늘 이렇게 우연히 만났지만 내가 저녁이라도 사주고 차라도 태워서 보내는 게 동창으로서 의리 아니겠느냐고 우겨서 부인을 데리고 나갔단다. 둘이서 즐겁게 데이트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동료에게 자기가 아주 예쁜 다른 여자를 소개시켜 줄 테니 오늘 만난 내 동창은 양보하라고 했다나. 그렇고 그렇게 해서 드디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스토리였다.

서로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저녁식사까지 하고 가라는 배중령 댁의 배려를 뿌리치고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다음 번에 주변에 있는 군과 관련된 사람들이 한번 전체적으로 모여서 한 잔 같이 하자는 약속을 뒤로 남긴 채.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영어공부를 조금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쇼핑하느라 한참을 걸어 다녔고 더구나 와인까지 한 잔 걸친 상태라 너무 피곤하다. 그런데 내일이 바로 어머님 생신이다. 11시경이면 한국나이로 아침 8시니까 그 때 전화를 드리기로 마음먹고 일단 자명종을 맞춘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한 참을 곤하게 자고 일어났는데 아직 10시밖에 되지 않았다.

아침 일곱 시면 전부들 일어나서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일단 전화를 걸었다. 내가 오늘 아침에 전화를 한다고 미리 얘기를 해놓아서인지 곧바로 어머님과 통화가 되었다. 축하말씀을 올리니 오히려 타국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들걱정부터 하신다. 여기에서의 생활은 재미있고 아무 불편없으니 걱정마시래도 어머님 마음은 아니 그런가 보다. 형과도 통화를 하였다. 어제 저녁에 막내 여동생이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올해 안으로 결혼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출발하기 전에 만났을 때 여동생이 간접적으로 암시를 하길래 눈치는 채고 있었는데 내가 고국에 없을 때 결혼하게 되면 아무래도 조금 섭섭할 것 같다. 떠나기 전에 만약 올해 결혼을 하게 되면 나는 참석을 못하니까 내가 귀국하여 결혼식에 참석하는 대신에 영국으로 신혼여행을 오는 비행기표를 마련해 주고 영국에서 숙식을 제공하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 얘기했었는데 아무래도 진담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온 가족을 돌아가며 한 마디씩 통화를 하다보니 전화카드가 다 되었다는 신호가 온다. 아쉽지만 수화기를 내려 놓을 수 밖에.

통화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와서 자리에 누웠지만 이런 저런 생각에 쉽게 잠을 들 수가 없어서 뒤척이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