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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생각 짧은 글/2. 비스듬히 세상 보기

좌충우돌 촌놈의 영국 유학기(1)

by 무딘펜 bluntpen 2008. 9. 4.


이 글은 제가 2004년 초에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처음 한달 가량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쓴 것을 한국의 직장친구들에게 편지로 보낸 내용을 그대로 실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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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모두들 별고 없으신지요? 조직개편이랑 진급, 보직 등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상당히 뒤숭숭한 마음들이실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저만 혼자 이곳에서 편안하게 지낸다는 것이 조금 죄스러운 생각도 듭니다만 이왕 선택한 길이니 주어진 기간동안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이미 전화를 드려서 알고 있겠지만 저는 무사히 영국에 도착하여 우여곡절 끝에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하여 재미있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랭귀지 센터에서 하루에 두 타임씩 세 시간을 영어 강습을 받고, 나머지 시간은 나름대로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이곳 대학이나 영국 국방성 측과 협조를 하여 직무훈련을 병행할 계획이고 올 가을부터는 Royal Military College of Science에서 1년짜리 석사과정을 밟을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유학이랍시고 시작하여 모자란 영어실력에 고전도 하지만,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저에게는 상당히 신선한 기쁨입니다.

제가 여기 와서 겪거나 느낀 것은 뒤에 자세하게 일기형식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읽어보면 재미있게 느끼는 부분도 있겠지만 실제 제가 겪을 때는 악몽 같은 일들도 많았습니다. 아무쪼록 읽어보시고 한 순간이라도 여러분에게 마음의 휴식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작년 연말부터 정말 내가 이렇게 운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점을 자주 느낍니다. 특히 다른 무엇보다도 주위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하고자 하는 일마다 적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 정말 고맙게 느껴집니다. 다시 한번 저의 유학생활이 시작될 수 있도록 힘 써 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항상 잊지 않겠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보람찬 생활되시길 빌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4. 1. 27
Shrivenham에서 김윤석 올림
나의 영국 유학일기


<출발 전에>
나의 유학 출발은 그야말로 007 특급작전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미국Duke University의 1+1과정에서 물을 먹은 후 영국의 Exeter University에 지원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아 거의 반포기 상태인 때가 2003년 12월이었다. 예산편성이라는 만만치 않은 업무로 인한 시간부족도 한 이유가 될 수 있었겠지만 결국 CBT 토플 217점이라는 낮은 점수로는 합격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상당한 심리적 공황 속에 보름에 보내고 12월 중순 경에 후배가 우연히 유학진도를 묻길래 포기했다고 했더니 마지막으로 한번 시도를 해보자면서 자기가 아는 여러 사람에게 길이 없겠느냐고 전화를 한 끝에 방산국제협력 분야에 근무하고 있는 분을 통하여 주한 영국대사관의 군수무관과 연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때는 영국을 포함한 서구 국가의 경우 크리스마스 휴가 시즌이라 일이 성사될 가망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12월 17일에 영국인 군수무관을 통하여 영국의 Cranfield University에Application letter를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크리스마스 전까지 Admission Letter를 보내주겠다는 연락를 받았으나 일이 여의치 않아 연말까지 도착하지를 않았다. 하지만 이왕 벌려 놓은 일이니 영국인 무관의 말을 무조건 믿고서 업무상으로는 과장님과 과원들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모든 일을 유학에만 전면하면서 Admission를 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모든 일을 진행하였다.

신상문제와 짐 정리, 여권발급, 비자신청, 아이들 학교문제 등 낮 시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저녁시간은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 대한 걱정에 송별회를 핑계하여 거의 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룰 만큼 마음이 불안하였다. 한편으로는 나의 파견 출발 마감일이 2003년 말까지였기 때문에 국방부나 행자부의 교육훈련 담당자들과의 협조가 매우 중요했다. 다행히도 두 부서의 담당자들이 나의 처지를 이해하여 주었고 매우 적극적으로 일을 처리하여 12월 31일에 일단 명령을 내 주었다. 특히 행자부의 담당사무관과 담당자의 도움은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마침내 1월 5일, 기다리고 기다리던Admission Letter가 도착하였고 1월 8일에 영국 군수무관의 도움을 받아 한시간 반 만에 Visa까지 받고 항공권도 받았다. 그리고는 낮에는 신상정리와 이삿짐 싸고 밤시간에는 각종 송별회로 매주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는 하루저녁도 빠짐없이 스케줄이 잡혔다. 나름대로 술 실력에 자신하는 나로서도 속이 쓰려 고생도 했지만 나의 뒤늦은 유학출발을 축하해주는 주위 분들의 성의는 정말 고마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1월 12일에 처와 아이들 그리고 큰 짐들은 옥천에 있는 처가에 보내고, 영국생활에 필요한 짐들은 박스 8개로 포장하여 우체국 소포로 발송하였다. 마지막으로 몇몇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느라 바쁘게 지내고 출발 하루 전에 파운드화와 여행자 수표로 3천만원 가량을 환전하고 대한항공 정부청사 지점에 가서 수하물 중량 초과에 대하여 협조를 구한 후 저녁에는 또 마지막 술판을 벌였다.

교섭을 시작한 지 꼭 한 달 만에 출국하는 것이니 정말 특급작전이라 부를 만하다. 그 동안 나의 유학문제에 신경 써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
 

<Friday, 16/01/2004>
개포동 공무원 임대아파트의 내가 살던 집 근처에서 혼자 살고 있는 후배 집에서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 후에 신라면으로 아침을 때웠다. 8시 경에 같은 과에 근무하는 분의 승용차로 무역센터에 있는 도심 공항 터미널로 가서 출국수속을 밟았다.

문제는 수화물이었는데, 유럽 쪽은 1인당 한도가 23Kg인데 어제 대한항공과 협조하여 63Kg으로 한도를 늘려 놓았지만 이민가방 두 개에 꽉꽉 눌러 싼 짐이 내가 들어올리기에도 벅찰 정도로 무거워서 엄청 불안했는데 간신히 61Kg으로 계체량을 통과하였다. 상당히 걱정했는데 만세다. 내가 감기몸살로 누워있는 사이에 집사람이 혼자서 끙끙대면서 싼 이민가방에는 목욕탕에서 쓰던 샴푸, 린스, 빨래비누에 애들 브레이드까지 들어있었다. 그러니 그 정도 무게가 나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공항 검색요원이 짐을 뒤지는데 마침 뚜껑이 헐겁게 닫힌 린스에서 액체가 조금 새어서 그녀의 손이 끈적끈적 조금 미안했다. 하여튼 우리 마누라는 알아 줘야한다. 대한항공의 담당인 김과장에게 수화물 한도를 늘려주어서 고맙다는 전화를 하였다.

공항 리무진 버스로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10시10분, 집사람과 사무실의 몇 사람에게 안부전화를 하고 롯데리아에 들러 햄버거로 간단히 요기 후에 12시 45분부터 탑승수속을 밟았다. 1인당 기내에 휴대하고 탑승할 수 있는 무게가 12Kg이었는데, 나는 여행용 가방 14.5Kg, 노트북과 손가방을 합하여 20Kg에 육박하는데도 의외로 무사히 통과하였다.

드디어 출발. 옆자리는 다행히도 비어 있었고, 그 옆에는 군용바지에 카이젤 수염을 기른 도저히 한국 사람으로 보기 어려운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는 일본사람으로 생각했다. 내가 창쪽이라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야 했다. "Excuse me!" 요기까지가 내 영어의 한계였다. "창쪽이 제 자리인데요."라고 얘기하려는데 도대체 생각이 나지 않고 머리가 아파온다.

에라, 모르겠다. "Window is my seat" 내입에서 나온 영어지만 이게 말이 되나? 좀 쪽 팔린다. 설상가상으로 이 녀석이 그냥 자리를 비켜 주면 될 텐데 영어로 뭐라고 쏼라쏼라 한다. 윽! 진퇴양난이다. 손가락으로 창쪽 자리를 가리키며 "Yes, Thisis my seat." 할 수 없이 원초적인 언어, Body language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말이 안 통하면 몸으로 때워야지 별수 있나 뭐. 하여튼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리고는 내 여행용 가방을 비행기 선반에 올리려는데 여기에도 내 당장 입을 옷을 비롯하여 바깥 쪽 지퍼 속까지 온갖 잡동사니를 넣어둔 터라 선반에 잘 들어가질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선반은 상당히 높다. 물론 내 키는 너무 작고. 까치발을 들고 끙끙대고 있는데 "도와 드릴까요?" 뒤를 돌아보니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있던 그 녀석 아닌가? 아니 이 넘이 한국 사람이었어? 애구 쪽 팔려. 그냥 처음부터 한국말로 할 걸 스튜디어스와 옆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짐 정리를 하고 나니 땀이 비 오듯 한다.

런던 Heathrow 공항까지는 11시간 30분이 걸렸다. 기내식이 두 번 나오고 음료수가 몇 번 돌았지만 가능하면 잠만 자려고 노력했다. 그 긴 시간동안 흡연욕구를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커피나 맥주를 마시면 도저히 참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96년도에 열흘 정도 단체 해외연수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지역을 둘러 본 적이 있었기에 이 코스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 때는 구경하러 가는 것이고 안내인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2년 동안의 장도에다가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곳에 홀홀 단신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으니 잠이 제대로 올리는 만무이다.

도착하기 직전에 아까 말한 옆 자리의 카이젤이 말을 걸어 왔다. 내 소개를 간단히 했더니, 자신은 런던에서 디자인 전공으로 3년간 유학을 마치고 잠시 귀국했다가 런던시내에 패션 의류점을 개장하기 위해 가는 중이라고 했다. 어쩐지 외모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더니만 런던의 날씨나 집값이나 등등 여러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80Kg이 넘는 짐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걱정을 했더니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으면 자신이 택시를 잡아 주겠다고 제안했다. 블랙캡이라고 불리는 런던택시는 매우 비싸기 때문에 개인영업을 하는 택시를 잡아 주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Thank you!"를 해야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에는 영국대사관의 한국인 군수무관이 마중 나오는 것으로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에 "NO, Thanks"라고 용감하게 말했다. 이것이 조금 후에 얘기하겠지만 천추의 한이 될 나의 실수이다.

Heathrow 공항에 도착하여 수화물을 찾았다. 이민가방에 금방 내 가방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뭔가 크게 표시를 해놓아야 했는데 깜박했다. 그래서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돌고 있는 비슷하게 생긴 이민 가방들을 일일이 확인하느라고 땀을 뺐다. 겨우 수화물을 챙겨서 캐리어에 싣고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많아야 이민가방 하나 정도, 나는 이민가방과 여행용가방, 서류가방, 노트북 가방을 산더미처럼 싣고 가는 나는 마치 보따리장수처럼 보였으리라는 생각이다.

입국수속을 밟는데 아차 Landing Card를 작성하지 않았군. 아까 기내에서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열심히 쓰더니만 이것이었군. 예전에 작성한 적이 있어서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드디어 데스크로 가서 외국인과의 첫 대화. 흑인 아가씨다. 뭐라고 쏼라 쏼라 묻는다. 그런데 단어 하나가 귀에 걸려들었다. Objective! 오 예! '목적'이라는 의미잖아? 그럼 이건 분명히 방문목적을 묻는 거지. 후후 "To study in Cranfield University" 내가 행각해도 훌륭한 답변이다.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면서 오버까지 했다. "Sponsored by Korean government." 나의 오버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가씨가 웃는다.

그리고는 내가 어느 정도 영어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 질문 아! 나의 실수다. 괜히 잘난 척 했다. 갑자기 배가 아파오면서 화장실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그냥 "얘가 지금 뭔 소리 하는겨?"하는 표정으로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째려보았다. 아가씨도 고개를 갸웃 갸웃하더니 몇 마디를 더 묻는다. 천천히 그러나 어차피 알아듣기를 포기했기에 끝까지 얼렁뚱땅한 표정으로 개겼다. She says "OK!" 드디어 통과. 공손히 "Thank you"하고는 내 나름대로 환한 웃음을 지어 주면서 빠져 나왔다.

나오는 통로를 따라 사람들이 각기 찾는 사람들의 팻말을 들고는 웅성웅성 서있다. 그런데 한국 사람처럼 생긴 사람은 아무도 안 보인다. 불안하다. 내 이름이 쓰인 팻말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30분이 흘렀다.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마침내 국제 미아가 되고 마는 것인가? 순간 세 가지가 후회스러웠다.

첫째는 내가 직접 영국 대사관에 연락하여 약속을 정했어야 하는데 나는 당연히 딴 사람이 연락을 해 준 것으로 알았고 영국의 낮 시간은 우리의 저녁 시간인데 매일 저녁 술 먹느라고 미처 직접 연락을 못했다. 그리고 둘째는 Cranfield 대학 소개책자에 보면 외국인 학생의 경우 미리 연락만 주면 학교에서 공항으로 직접 마중을 나오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것을 이용했으면 남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안전하게 학교까지 갈 수 있었을 텐데 미처 연락을 취하지 못한 점이다. 마지막으로 아까 만났던 카이젤 수염이 택시를 잡아 준다고 했을 때 고맙게 받아 들였어야 하는데 이제는 아무리 둘러봐도 얼룩무늬 군복바지 차림의 카이젤은 보이지 않는다.

순간 독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후회해야 소용없다. 일단 마중 나오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결론을 짓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떠나기 전에 정보본부에 연락하여 영국에 있는 군수무관의 전화번호를 파악해 두었으니 일단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중전화가 공짜가 어디 있나? 뭐든지 넣어야 통화가 될 것 아닌가? 주위를 아무리 배회해도 Telephone Card라는 글자는 안 보인다. 마침 1파운드짜리가 있어서 넣어 보려고 해도 구멍이 작아서 들어가지도 않는다. 한국에서 가져온 신용카드를 넣어도 전혀 반응이 없다. 결국 인천공항에서 산 1만원짜리 국제전화카드를 이용하여 전화를 하는데 어떤 번호를 눌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찬찬히 사용설명서를 읽어보니 그 카드는 국내의 KT에서 발급한 것이라서 한국을 통하여 다시 영국으로 통화를 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영국으로 전화를 거는 것처럼 영국 국가번호를 포함하여 누르되, 지역번호의 앞에 있는 0은 생략하고 누르는 것이었다. 많은 시도 끝에 결국 신호가 간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재중이란다. 다시 걸었다. 그런데 충전된 돈이 다 떨어졌단다. 이렇게 비쌀 수가 있나? 단 2분만에 1만원이 날아갔다. 이런 일이이제 나는 이곳에서 결국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날씨도 꽤나 쌀쌀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일단 공항 밖으로 빠져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도저히 견적이 나오질 않는다. 담배를 서너 대 피웠다. 버스를 탈까? 기차를 탈까? 그러나 버스나 기차를 어디서 어떻게 타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이민가방 2개, 여행용 가방 하나, 노트북, 서류가방까지 도합 5개, 80Kg이 넘는 짐을 들고 버스나 기차를 탈 수 있을까? 도저히 불가능하다. 목적지인 Shrivenham까지는 직통으로 가는 버스나 기차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방법은 하나, 택시를 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많은 짐을 택시가 실어 줄까? 음. 고민은 많지만 해결책은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이 없는 이상 일단 부딪쳐 보고 여의치 않으면 이민가방 속에 든 이불을 덮고 공항에서 자는 한이 있어도 시도는 해보자고 결심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I'm come from Korea. I should go to Cranfield University in Shrivenham. What can I do? Please help me. Please call the taxi!" 나의 발음이 형편없었는지 아니면 바빴는지 두 사람은 "Sorry!"하고서는 그냥 지나갔다.

조금씩 절망감이 몰려든다. 다시 담배를 한 대 물고는 담배연기를 길게 하늘로 뿜어내었다. 담배를 끊지 않길 정말 잘했다. 이럴 때 담배라도 없었으면 아마 공항 구석에 가서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 때 뒤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반갑다. 뒤를 돌아보니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 애들이 셋이 서서 뭔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만난 첫 구세주다. 체면이고 뭐고 얼른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는 내 사정을 얘기했다. 물론 한국말로다. 그랬더니 그 중 조금 잘생긴 남자애가 자기 핸드폰으로 한국 군수무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준다.

통화가 되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매달렸다. 내 소개를 간단히 하고 지금의 상황을 한참 설명했다. 그런데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본인은 내가 여기 온다는 것에 대하여 연락 받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도 Shrivenham이 어디에 붙었는지, RMCS가 뭘 하는 곳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와주기 곤란하단다. 내가 국방부 어느 부서에 근무했었는지 간단히 묻고 자리를 잡으면 연락하라고 한다.

할 말이 없었다. 알았다고 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는 정말 이 학생들을 놓치면 끝이다. 그들에게 부탁하여 택시를 불러달라고 했다. 엄청 비쌀 거라고 걱정을 해 주었지만 이제 방법은 무리를 해서라도 목적지까지 가는 수밖에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다. 그들도 이 짐을 가지고 버스나 기차로 가는 것은 무리라는 점을 인정했다. 다행히 그 학생들이 친절하게 택시가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총알택시 비슷한 시외를 뛰는 Uni Cab이라는 택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런던 택시인 Black Cab을 잡았는데  비싸기로 소문난 택시다. Shrivenham까지는 198파운드라고 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44만원. 으악 이 돈이면 서울에서 부산까지도 택시타고 갈 수 있겠다. 어쩌랴? 무조건 택시를 타고 "I want to go Shrivenham"을 외쳤다.

운전사는 30대로 되어 보이는 콧수염을 기른 껄렁하게 생긴 사내였다. 어디서 왔느냐? 무엇하러 shrivenham에 가느냐 등 호구조사를 받고 나서  내 사정을 더듬거리며 설명했다. 동사는 거의 없고 명사만으로 이루어진 고약한 단어 덩어리였는데도 의외로 친절하게 들어주며 내 상황을 이해하는 눈치였다.

조금씩 마음이 풀리면서 "Why do you call this London Taxi 'Black Cab'?" 했더니 예전에는 거의 모든 택시가 검정색이었는데 요즘은 다양한 색의 택시가 있고 자기 차도 녹색이란다. 다만 License 색깔이 검정색이라서 아직 그렇게 부른다며 자신의 면허증을 보여 주었다. 가는 도중에 영국의 날씨, 물가, 우리나라와 영국의 도로 및 차의 차이 등에 대하여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마음을 비우니까 의외로 간단한 대화는 나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고난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Shrivenham에 있는Royal Military College of Science의 Military Acommodations이라는 것만 알 뿐 그곳의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른다. 달랑 가지고 있는 것이 Cranfield University의 Adimission(그것도 사본) 하나. 거기다 택시기사와 의사소통도 원활치 않은 상황.

하여튼 일단 Swindon까지 갔다. 거기부터는 택시기사도 걱정이 되는지 이것저것 물어 보지만 뭘 묻는지 알아야 답변을 하지. Admission을 보여 주며 더듬더듬 내 상황을 설명했다. 중간 중간에 터지는 택시기사의 질문은 어차피 안 들리니까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택시기사가 차를 세우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여러 군데 전화를 한다. 나는 그냥 배째라 하고 택시에 타고 있었다.

잠시 후 Shrivenham에 도착했다. 상당히 작은 마을이다. 이리 저리 돌다가 RMCS 표지판을 발견하고는 함께 기뻐했으나 그곳은 후문이었고 한참을 뒤돌아 나와서야 Defence Academy-Shrivenham의RMCS, JSCSC(Joint Services Command and staff college), DLC(Defence Leadership Centre)와 런던에 있는 RCDS(Royal College of Defence Studies)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국방대학교와 비슷한 학교기관)-의 정문을 찾았다.

일단 우리나라의 경비실과 비슷하게 생긴 Reception Hall로 갔다. 내 사정을 이미 설명을 받은 택시기사의 응원을 받으면서 데스크에서 근무 중인 나이 지긋한 콧수염에게 또 손짓 발짓을 시작했다. 그러나 Admission Letter 복사본 이외에는 아무 증명서도 없이 1월 19일부터 여기에서 어학연수를 받도록 되어 있고, 기숙사도 이미 신청이 되어 있다고 우기는 나의 서투른 English에 답답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나 더 이상 갈 데도 없었다. 여기서도 내가 준비한 내 상황 설명용 멘트를 한바탕 늘어놓고 나서는 그냥 개기기 작전. 이 사람 저 사람이 나와서는 나와의 의사소통을 시도했지만 나는 똑 같은 작전으로 일관하였다. 한참 뒤에야 그들도 지쳤는지 그 중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OK, I see!" 하고는 나를 기숙사로 안내하여 주었다.

오늘의 도우미 택시기사에게 택시비가 얼마냐고 했더니 원래는 198파운드인데 190파운드만 내라고 했다. 엄청난 돈이었지만 아침에 일어난 후 24시간을 계속 스트레스에 시달린 나로서는 더 이상 돈이고 뭐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위해 여러 곳을 돌면서 도와주기 위해 애쓴 공로를 생각하여 5파운드를 팁으로 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건 내가 인심 쓴 게 아니었다. 보통 요금의 10%에서 15% 정도를 팁으로 주는 것이 관례란다. 나는 그것보다 적게 주었지만 워낙 액수가 크고 내가 외국인이다 보니 아무 말 않은 것 같다.)

간단하게 입실원서를 쓰고 끙끙대며 짐을 2층 복도 끝에 있는 내방으로 지정된 곳으로 옮기고 나니 시간이 벌써 밤 10시다. 한국시간으로는 다음날 아침 7시. 하여튼 일단 잠자리는 마련되었다. 성공이다. 그런데 피곤하기도 하지만 배가 몹시 고프다. 경비에게 물어보니 이미 Snack Bar도 문을 닫았다고 하길래 슈퍼마켓의 위치를 물어서 간신히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가게로 갔더니 바로 옆에 맥도널드 가게가 막 문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Just a moment!" 그래도 한번 먹어 본 음식이 안전하다는 판단 하에 맥도널드에 들어가서 빅맥 하나에 콜라를 곁들여 저녁을 때우고는 슈퍼에 들러서 버드와이저 2병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상당히 쉽게 들리겠지만, 내 영어실력으로 경비에게 슈퍼마켓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나 빅맥에 콜라 사고, 버드와이저 사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짐작했을 것이다. 슈퍼에서는 전화카드를 사려고 "Do you have a Phone Card?"를 외쳤으나 도저히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가 내 말을 못 알아 듣길래 눈물을 머금고 후퇴했다.(나중에 조금 실력이 좋아지면 반드시 거기 슈퍼에서 전화카드를 파는지 여부를 확인해야겠다.)

여기서 얘기가 끝이 났을까? 아니다. 슈퍼에 들러 복귀하려는데 이곳 Defence Academy는 군사 시설이라 입구에 초소가 있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무나 들여보내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된다. 입구에서 경비가 막아섰다. "Can I see your Pass, please?" "Oh, I see." 나는 당당하게 Passport(여권)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No, no. Your Pass, please?" 이게 아닌가본데. 통행증을 요구하는 것 같다. 이번에는 기숙사 열쇠를 꺼내 들고는 보여 주었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또 한참동안 내 입장을 설명했다. 그러나 기숙사 이름도 모르는 처지에 통과는 어불성설이다.(나중에 알고 보니 기숙사는 Kitchener Hall이었다. 두개의 기숙사 중 하나는 Roberts Hall이고). 다시 Reception Hall로 끌려갔다(?). 또 어떻게 이 난국을 타개하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아까 처음 들어올 때 근무하던 담당자 콧수염이 그대로 근무 중이라 임시 통행증이라며 종이에 낙서처럼 긁적긁적해서 한 장을 써 주는 바람에 통과할 수 있었다. 일단 고마웠다.

방으로 돌아와 슈퍼에서 사가지고 온 맥주를 한 잔하며 하루들 돌아보았다. 아! 정말 하루가 한 달처럼 길게 느껴진다는 말이 실감나는 날이었다. 그런데 맥주 안주가 없다. 이민가방을 뒤지니 짐을 싸면서 곳곳에 찔러 넣어둔 신라면이 있었다. 

그냥 먹으려다 날씨도 쌀쌀하고 속이 허하고 마침 탁자 위에 전기 주전자가 눈에 띄었다. 이곳 전기 주전자는 우리와는 달리 주전자 안에 열을 가하는 니크롬선인가가 나와 있어서 직접 물과 닿아 있기에 1분 내로 물이 보글보글 끓었다. 일단 라면에 스프를 넣은 후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입구를 봉하고 5분을 기다렸다. 군대 생활할 때 사병들이 몰래 해먹던 봉지라면 흉내를 낸 것인데 의외로 정말 맛있었다. 젓가락이 없으니 당연히 티스푼을 사용하여 건더기를 건져 먹고 국물은 봉지 째로 들이켰다.

술과 따뜻한 라면을 먹었으니 당연히 생각나는 건 담배 한 개피. 기숙사 건물 전체가 금연인 것은 상식이지만 이 시간에 한참 떨어진 입구로 나가서 담배를 핀다는 것은 역시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미안하지만 그냥 창문을 열고는 담배를 피웠다.

12시가 되었다. 지금 한국은 아침 9시이리라. 무사히 도착했다고 집에 전화를 하고 싶었으나 전화카드를 구하지 못하였으니 뭔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겠지. 마침 KT에서 제공하는 무료 통화권이 있었다. 탑승권의 pin번호를 입력하면 3분 정도 통화 가능한 것이어서 0800으로 시작하는 10자리를 누르고 다시 Pin번호 10자리인가를 누르고 0082에 지역번호, 전화번호 해서 한참을 정신없이 누르니 그것으로 집사람과 겨우 통화가 되었다.

 무사히 도착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스스로 내 처지가 걱정이 되었다. 사무실에도 전화를 하려고 하였으나 잔액 부족으로 끝. 데이콤과 KT에서 예전에 제공한 카드에 5000원 정도가 무료 충전되어 있었으나 유효기간이 지나버려 사용이 불가능했다. 이제는 내가 아는 사람들과의 연락수단도 완전히 두절되었다. 할 수 없이 그냥 들어와 자는 수밖에.

이렇게 나의 유학생활 첫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닥칠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나를 이 침대에서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도와준 여러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복들 많이 받으세요.

- 제2탄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