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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생각 짧은 글/2. 비스듬히 세상 보기

좌충우돌 촌놈의 영국 유학기(2)

by 무딘펜 bluntpen 2008. 9. 4.


<17/01/2004, Saturday>

시차 때문인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침대가 좀 오래되었는지 심하게 삐걱거린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공항 구석에서 노숙자처럼 잠을 잘 처지에서 구식 철제 침대나마 이불 덮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러나 잠깐씩 잠이 들었다 깨는데 자꾸만 꿈만 꾼다. 재미있는 것은 꾸는 꿈마다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을 만나서 반가워하는 내용이다. 오라! 내가 현재 기대하는 가장 큰 바램이 무엇인지 알겠다. 그러나 그건 바람일 뿐 이루어 질 수는 없는 일임을 나는 알고 있다.

뒤척인 끝에 할 수 없이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서류정리와 내일 할 일을 생각하다가 기숙사가 문을 여는 6시에 운동복 차림으로 밖으로 나가서 주변을 산책하였다. 이곳 Kitchener Hall과 옆에 있는 Roberts Hall은 두 곳이 똑같이 생겼는데 3층 건물로 길이가 상당히 길다. 추측건대 500명 이상 수용이 가능할 것 같다.

기숙사 앞으로는 정원에 잔디와 나무가 잘 가꾸어져 있고, 뒤쪽에는 넓다란 운동장이 있는데 길이가 700미터는 넘을 것 같다.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잔디가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운동장 너머로 가보니 JSCSC라고 팻말이 붙은 건물이 있다. 우리나라의 합참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상당히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데 의외로 높이는 낮은 3층 건물로 아기자기하게 지어져 있어서 우리나라 대학과 같이 사각형의 수용소식 건물과는 차이가 있다.

요 정도까지 돌아보니 겨울 날씨라 운동복 한 벌로는 추위를 감당하기 힘들어서 방으로 돌아왔다. 기숙사 안내책자를 보니 토요일은 8시부터 아침 식사 시간이다. 그런데 추워서 잠시 소파에 기대 있으려는 것이  그만 잠이 드는 바람에 식사시간을 놓쳐 버렸다.

10시 경에 일어나 이민가방을 헤쳐 놓고 비누, 치약, 수건 같은 당장 필요한 생활 용품들을 꺼내어 정리했다. 그런데 세제를 담은 비닐에서 린스가 새어서 온통 끈적끈적하였다. 그 속에 든 것을 모두 꺼내어 씻고 말리느라 오전 시간이 다 갔다.

점심식사는 12시 30분부터이다. 구내식당으로 갔다. 외지에서의 생존을 위해 충분한 영양섭취는 필수적이다. 몸이 재산이다. 앞으로 절대로 한 끼도 빼먹지 않고 먹어 주리라 생각하며 일단 고기류 한조각과 삶은 감자 하나, 그리고 빵처럼 생긴 것을 한 조각씩 담아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앞에 앉은 흑인 청년에게 "Hi! Good afternoon"하고는 서툰 나이프와 포크질을 하면서 식사했다. 그런데 음식선택이 부적절했다. 고기와 빵까지는 큰 무리가 없었는데 빵처럼 생긴 것은 나이프로 썰어보니 빵이 아니었다. 빵 껍질로 덮여 있긴 하지만 그 안에 무슨 고기인지를 죽처럼 끓여 만들 것인데 냄새와 맛이 상당히 역겨웠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선택한 것에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무조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후식으로 카푸치노를 먹었는데 맛이 별루다. 억지로 다 먹고는 옆에 있는 홍차 티백 4개를 슬쩍하여 방으로 돌아왔다.

일단 가장 급한 일은 한국과 연락방법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내 노트북의 무선카드는 작동하지 않았고, 방안에 Lan이 깔려 있지도 않다. 더구나 내 노트북 전원을 연결하는 플러그는 우리나라에서 통상 사용하는 가지가 두개짜리인데, 여기는 3구짜리고 모양도 전혀 다르다. 어댑터가 없이는 사용 불능이다.

일단 경비에게 가서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곳을 물었더니 컴퓨터실을 가르쳐 줘서 그리로 갔다. 인터넷만 된다면야 어디든 내 세상이지. 거기 가서 의기양양하게 PC를 켰더니 아뿔사 ID와 Password를 묻는다. 그럼 그렇지 여기가 어딘데 함부로 인터넷을 사용하게 할까?

하릴없이 앉아 있었더니 "May I help you?" 어디선가 들려오는 천사의 목소리. 아까 점심식사 때 앞에 앉았던 흑인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컴퓨터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 가보다 생각하는 것 같다. 하여튼 내 장황한 상황설명을 접수 후 그는 자기 것인지는 몰라도 ID와 Password를 넣어 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간신히 집사람과 사무실 사람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조차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다. 컴퓨터가 한글을 지원하지 못한다. 아예 자판에 한글이 없고 물론 한영 변환키는 더더구나 없을 뿐만 아니라 글자 위치도 우리와 다르다. 어찌 어찌하여 야후 코리아로 접속하고는 영어로 떠듬떠듬 썼다. 무사히 갈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아주 기초적인 영어라서 모두들 알아먹겠지만 답장은 기대하지 않는다. 어차피 한글로 답장을 보내면 이곳에서 볼 수도 없을 테고, 영문으로 답장을 써 줄 여유가 있는 사람도 없을 테니!

다음 할 일은 전화카드, 건전지, 전기플러그 어댑터 구입인데 경비에게 어디로 가면 이것들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어제 저녁에 갔던 그 슈퍼를를 가르쳐준다. 거기에는 분명히 전화카드와 어댑터가 없었는데 나를 바보로 아나 보다.

그러나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라서 그냥 알아들은 체를 하고는 그 슈퍼에 가서 카세트에 쓸 건전지만 샀다. 그냥 돌아오는 것은 좀 밋밋해서 일단 Shrivenham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한참을 걷고 걸어도 그냥 거기가 거기 같고 그 집이 그 집 같다. 바로 옆의 마을은 Watchfield였다. 이곳은 교회고 우체국이고 술집이고 간에 외양이 일반 가정집과 특별히 다르지 않고, 우리와 같은 요란한 간판이 달린 곳은 발견할 수 없다. 관공서 건물도 길이 1미터 폭 30센티미터 정도의 하얀 바탕에 고딕으로 Watchfield Post Office 라고 간단하게 적혀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아니면 건물 앞에 가기까지는 어디가 무엇을 하는 건물인지 전혀 알아 볼 수가 없다. 전화카드나 어댑터, 슬리퍼 등 필요한 다른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가게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물론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곳에는 집 앞을 지나가면 대부분의 집들이 5미터 정도 거리에서 자동으로 현관등이 켜지도록 되어 있었다. 행인에 대한 배려인 것 같기도 하고 도난방지를 위한 조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곳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났을 때 우리나라와의 큰 차이 한 가지는 누구를 만나도 상냥하게 웃으면서 "Hello!" "Hi!" "Good afternoon!"하고 인사를 해 준다는 것이다. 다른 영어는 몰라도 동방예의지국 출신인 나도 사람을 만나면 인사는 철저하게 잘 하면서 돌아다녔다.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식당에서 들고 온 홍차를 한 잔 마시며 담배를 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분명히 방에서는 금연이라고 알고 있는데 방안에서 재떨이를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아마 아무리 강조해도 꼴초들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기숙사 측에서도 짐작한 끝에 내린 배려가 아닐까 생각하며 고맙게 방에서 흡연했다.

주머니를 뒤지니 동전에 제법 많다. 1파운드, 2파운드, 50/20/10/5/2펜스, 1페니짜리가 각각 모양도 크기도 제 각각이다. 앞으로 자주 다루어야 할 테니까 늘어놓고 연구를 좀 했으나 헷갈리긴 마찬가지다.

저녁식사는 점심식사의 교훈을 거울삼아 베이컨 한 조각, 소시지 하나, 양파수프 한 접시를 해치우고 과자를 조금 먹었다. 큰 무리가 없는 선택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온다. 어제 저녁에 잠을 별루 못 잔데다가 시차 적응 문제 때문일 게다. 모든 것 포기하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기숙사 규칙, 대학 소개책자 등을 조금씩 읽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