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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생각 짧은 글/2. 비스듬히 세상 보기

좌충우돌 촌놈의 영국 유학기(3)

by 무딘펜 bluntpen 2008. 9. 4.


<18/01/2004, Sunday>

어제 저녁도 무척 뒤척이며 잤는가 보다. 베개가 방바닥에 떨어져 있다. 그리고 머리도 영 개운치가 않다. 이 곳 기숙사는 2평 정도의 넓이에 낡은 침대가 하나 덜렁, 그리고 책상하나, 옷장하나, 책장 2개, 그리곤 세면대가 끝이다.  

옷걸이도 없어서 그냥 옷을 펼쳐두고 있고 슬리퍼도 없다.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으므로 나는 보통 때는 그냥 맨발로 다닌다. 불편한 점은 화장실이 조금 떨어져 있다는 것이고 더욱 불편한 것은 화장실과 붙어 있는 샤워장에 더운 물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개운하게 샤워나 하러 가서 옷을 벗고 샤워기를 작동시켰다가 기겁을 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머리위로 쏴--- 추워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또한 어쩌랴. 몸을 달래가며 간신히 샤워를 마쳤다. 빨리 바깥에 집을 얻어서 나가 생활하는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침식사는 빵 두 조각과 후레이크를 우유에 부어서 먹었다. 가끔 집에서도 먹던 것이어서 큰 거부감이 없었다. 오늘 후식은 코코아를 먹어 보았는데 너무 달았다. 생활의 지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무슨 음식이건 처음 먹어보는 것은 아주 조금씩 담아가서 맛을 본 후 먹기에 부담 없는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부터 그것을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

아침 9시 경에는 해가 뜨기 시작한다. 영국의 겨울에는 해를 보기 힘들다는 얘기를 믿을 수가 없다. 도착하는 날도 하늘에서 보니 햇살이 비치고 있었고, 어제 그리고 오늘도 햇살이 제법이다. 여기는 주위에 높은 산이 없고 보이는 것은 낮은 언덕뿐이다.

그 위로 해가 솟아오르는데 우리나라보다 공기가 훨씬 깨끗한 때문인지 정말 환하게 해가 비친다. 뿐만 아니라 햇살이 무척 따습다.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다 소파를 끌어다 놓고서 비스듬히 누워 햇살을 받으니 뿌듯이 안도감이 가슴 속에 밀려온다.

이 순간은 내 현재의 처지가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 어차피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집을 구하거나 물건을 사거나 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소파에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다 졸다가 책을 좀 읽다가 하면서 오전을 보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는 Shrivenham 캠퍼스 구경을 갔다. 엄청 넓다. 어제 돌아본 JSCSC말고 RMCS를 도는 데만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대부분 3층 정도의 말보로 홀이니 제임스 홀이니 하는 고풍스런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고 주변에 수백 년은 된 듯한 나무랑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는 것이 보기 좋았다. 캠퍼스 바깥쪽으로는 골프장, 수영장, 승마장 같은 레저시설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나는 출입증이 없어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캠퍼스보다 훨씬 넓어 보이고 끝이 어딘지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영국에서 받는 처음 인상은 전통을 중요시하여 왠만큼 참을 수 있는 것은 옛 것을 그냥 약간만 고쳐서 계속 사용한다는 것이다. 옛 것이라면 뭔가 손 봐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우리나라와는 대비되는 면이 있다. 물론 보수적인 영국 시각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옛 것을 고집하다 보니 시대에 뒤떨어지고 생활에 불편을 주는 것들도 매우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반대로 무조건 바꾼다고 좋은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기숙사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여기는 까마귀들이 정말 많다. 한국에서는 근래 들어 까마귀 구경을 거의 못했는데 여기는 까치나 비둘기보다 까마귀 보기가 훨씬 쉽다. 어지럽게 날아다니며 까악까악 우는데, 한국에서 같으면 불길하고 기분이 나빴겠지만 여기서는 그냥 용서해 주기로 했다.

피곤감이 밀려와서 쉬고 싶었지만 시간이 있을 때 한 가지라도 경험해 보는 것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에 일단 여기 Shrivenham보다 큰 읍내 도시인 Swindon을 돌아보기로 했다. 경비에게 Swindon행 버스시간을 물어보았더니 성의껏은 알려 주는데 잘 못 알아듣겠다.

일단 버스정거장 위치는 알아들었으니 20분 정도를 걸어서 정류장으로 갔다. 마침 버스시간표가 걸려 있어서 살펴보니 일요일에는 몇 대 안 다니는 걸루 되어있다. 30분 정도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일단 학교 정문의 Reception으로 쳐들어갔다.

기숙사 소개 책자에 보니 Local Taxi가 이용가능한데 Swindon까지 8 파운드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기에 Local Taxi를 불러 달라고 했다. 잠시 후에 택시가 왔다. 타고서 무조건 Swindon으로 가자고 했다.

가는 도중에 생각해 보니 무작정 가는 것보다 당장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는 곳이 좋을 것 같아 또 장황한 설명을 통하여 노트북을 작동시킬 수 있는 플러그 어댑터를 살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여러 가지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밀집한 마켓지역으로 갔다.

"Excuse me. I'm Korean. I want to work my notebook computer. But my notebook power line has two tree flug. But here in UK, use only three hole concent. So I need a three tree flug adaptor. Help me. please"

내 말을 알아듣는 점원도 있었지만 쉽게 원하는 물건을 찾을 수가 없었다. 택시기사의 지원사격까지 받아가면서 몇 집을 전전한 끝에 어댑터를 겨우 구하고, 헤어스프레이까지 사고 나니 매우 피곤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복귀했다.

왕복 택시요금이 무려 26파운드였다. 내가 2003년도 학교 소개책자에서 본 바로는 편도요금이 8파운드였는데 조금 비싼 듯 했다. 그러나 근래의 물가려니 생각하고 또 물건을 살 때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도와준 공을 생각해서 그냥 지불했다.

어댑터 3개, 헤어스프레이 하나 도합 12.87파운드를 사는데 배나 되는 택시요금을 지불했으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장사였지만 모르는 게 죄라고 어쩔 수 없다.

하여튼 돌아와서 작동시켜 보니 노트북이 잘 작동된다. 기쁘다. 기억을 더듬어 첫날부터의 일들을 한번 정리해 보는 중이다. 얼마나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나름대로 이 생활에 적응했다는 자신감이 있기 전까지는 써야 할 것 같다.

3일째인 오늘까지 생활하면서 느낀 점은 말이 안 통하고 생소한 환경에 놓이게 되니까 사람이 마치 애기가 된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뭐든지 묻고 도움을 받고 모방을 하는 수밖에 없다.

가장 많이 쓰이는 영어표현은 역시 의문문이다. 랭킹 1위는 "Where can I ---?" 2위는 "How can I---?", 3위는 "Could you --- for me?". 뭐든지 묻고 요청하고 확인하고 이것이 요즘의 나의 생활이다. 그래도 생존하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저녁 식사는 별 문제없이 해결했다. 그리고는 방으로 돌아와서 한국에서 가지곤 온 영어공부자료를 펴 놓고 조금 공부하다 잠이 들었다.

<Monday, January 19, 2004>

아침 7시에 일어났다. 조금 머리가 덜 아픈 걸 보니 이제 시차는 극복이 되었나 보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주변을 간단하게 조깅한 후에 아침식사를 하였다. 빵과 오트밀만 먹었더니 무리가 없었다.

여기 식당은 정말 복잡하다. 메인디쉬 및 여러 종류의 소스류가 놓인 테이블, 수프 및 전채류가 있는 테이블, 과일음료나 과자가 있는 테이블, 후레이크나 오트밀 같은 간단한 식사가 있는 테이블, 빵을 직접 구워먹거나 커피, 코코아 등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 등 일일이 거치려면 엄청 머리 아프다.

더구나 자리에 앉으면 나이프가 두 개, 스푼이 한 개, 포크가 두 개 있는데 음식의 종류에 따라 항상 다르다. 나 같은 촌놈이 도대체 어떻게 먹으라고 그렇게 복잡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짧은 영어실력에 물어 볼 수도 없고 나는 그 중 안전한 소고기류 한 종류와 빵 한 조각, 후레이크류, 그리고 소스는 일단 하루에 한 가지씩만 조금씩 덜어다 맛을 본다. 다음 식사를 대비한 포석이다.

사람들이 앉는 자리도 제 각각인데 아마도 계급에 따라 관습적으로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야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랴. 아무데나 앉는다. 그래도 탓할 사람 없다. 탓을 해 봤자 내가 못 알아듣는다.

식사 후에는 처음으로 방 청소를 했다. 그 동안 피운 담배꽁초도 좀 치우고 침대시트도 정리했다. 쓰레기 처리가 문제여서 카운터로 가지고 갔다. "How can I treat this trash?" 그럴 듯 하다. 그런데 못 알아듣는다. 할 수 없이 봉지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주자 "rubbish?"하면서 겨우 알아듣고는 그 앞의 큰 쓰레기통에 넣으라고 한다. 조치 완료. 영국에서는 쓰레기를rubbish라고 하는군. 또 한 가지 배웠다.

화장실에 갔더니 어떤 녀석이 샤워를 하고 있다. 무척 추울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볼 일만 보고 나오려다가 샤워실 문을 두드렸다. "Hello!" 덩치가 엄청 큰 녀석이 빼꼼이 얼굴만 내민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는 눈초리다.

그러나 난 궁금한 건 못 참는다. 아니 안 참는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따뜻한 물이 나오느냐고 묻고 싶다. "Hot water?" 흠! 영리한 녀석이다. 아이큐가 150은 족히 넘을 것 같다. 내 말을 이해하는 걸 보니. 뭐라고 설명하는데 다른 건 못 알아듣고 Monday to Friday, from six to twenty는 내 레이다망에 걸린다. 아하! 평일에는 아침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뜨거운 물이 나온다는 거구나. 나두 눈치 9단이 다 되었다. 어제 샤워할 때는 일요일이라서 아침 이른 시간에 따뜻한 물이 안 나온 것으로 이해됐다.

얼른 방으로 돌아와서는 샤워 준비를 해서는 샤워장으로 갔다. 원초적인 자세로 물을 틀었다. 앗! 차가워. 속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그냥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나쁜 넘. 그런데 몇분 정도 지나가니 어쩐지 물이 뜨뜻미지근해진다. 아하! 물은 틀고 좀 기다려야 하는구나. 기분 좋게 샤워를 했다.

아홉시 경이 되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노크한다. 깜짝 놀랐지만 나의 방에 오는 첫 손님이니 나가서 공손히 문을 열었다. 한눈에도 방을 청소해주는 아저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며칠에 한번씩 오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리고 청소나 하시지 나에게 뭔가를 쏼라쏼라 한다. 영국 청소부들은 매우 건방지군. "OK, OK"하고서는 그냥 무시를 하려 했으나sheet 얘기가 나오고, Weekly와Change라는 말이 들렸다. 일주일마다 시트를 갈아준다는 얘기?

이어서 "What do you want 쏼라쏼라?" 뭔가 나에게 선택을 하라는 얘기구나. 용감하게 "Pardon?" 그랬더니 설명하는 말 중에 Every two weeks라는 말이 나온다.

흠. 종합해보니 침대시트를 매일 갈아주랴? 아니면 2주마다 한번 갈아주랴? 묻는 거라는 결론. 내가 여기 얼마나 살 거라고 매주 갈겠수. "Every two weeks, Please" 딱 알아듣는 걸 보니 내 발음도 상당히 좋아졌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뿌듯하였다. 이 아자씨는 그리고 나서 내가 이미 청소를 끝낸 방을 몇 번 훔치는 척 하더니 또 뭔가를 쏼라 쏼라 한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제일 발음이 최악이다. 도저히 독해 불가다. 알아듣는 척하고 그냥 "OK, OK"를 연발했더니 "Thank you"하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는 나가 버린다. 뭐가 최고라는 건지 원. 하여튼 첫 손님 맞이 성공적으로 완료.

오늘이 월요일, 1월 19일이니 내 첫 랭귀지 코스 수업이 있는 날이다. 내가 작성했던 Language Course 지원서를 살펴보니 11시 30분부터 13시까지 강의를 듣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길래 10시 경에 집을 나섰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하나? 어제 캠퍼스 구경을 할 때도 Language Centre는 보지 못했다.

가방을 둘러메고 일단 나섰다. 캠퍼스로 가는 도중에 앞에서 걸어오는 군인 한 사람을 체포했다. "Where is the RMCS language Centre?" 이정도 영어는 기본이다. 이제는 발음도 상당히 좋다. 군인 아저씨께서는 여기 캠퍼스가 워낙 커서 자기도 모르겠단다. 다만 옆에 있는 군 기숙사인 Roberts Hall에 가서 물어 보겠단다.

이보슈, 나도 귀가 있고 입이 있수다. 내가 물어 볼 수 있다구. "Thanks, I'll try it by myself" 알아들었는지 "Sorry"하면서 제 갈 길을 갔다. 일단 Roberts Hall에 들어가니 상당한 거구의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덩치는 코끼리처럼 컸지만 얼굴은 무척 귀엽다. 목소리도.

"How can I reach the Language Centre?" 항상 같은 표현만을 쓰면 식상하니까 표현을 바꾸어 물었다. 알겠지? 나의 영어실력. 귀여운 아가씨가 한참을 통화하더니 캠퍼스 약도를 꺼내놓고서는 위치를 가르쳐준다. Spar Shop의 옆이라고 한다. 어제 미리 정찰을 해 두었기 때문에  한눈에 어딘지 알아볼 수 있었다.

한참을 걸어서 갔더니 조립식 건물로 지은 Language Centre가 나타났다. 일단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결전을 준비한 후 용감하게 전진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계 각국에서 온 대학생 또래의 애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정신이 사납다. 그런데 마음씨 좋게 생긴 아줌마 한 사람이 나를 보고 반색을 한다. "Hello, are you Yoon Seok Kim?" 내 이름이다. Roberts Hall의 귀여운 코끼리 아가씨의 전화를 받고 내가 올 줄 미리 알고 있었구나. 자기 이름은Margaret이라고 소개하며 나를 안내했다.

일단 으슥한 방으로 들어가더니 몇 가지를 질문 하는데 역시 잘 못 알아듣겠다. 아는 것만 대강 대답했다. 나의 영어실력 테스트를 하겠단다. 30분의 시간을 주고 60문제를 괄호 채워 넣기 식으로 풀어 보랜다. 주로 동사의 활용에 관한 문제였다.

55문제 정도를 푸니 시간이 다 되었다. 친절하게 옆에서 채점을 해준다. 42문제를 맞추었다. 100점 만점에 70점 정도 되는 수준인가? 필기로 보는 시험이니까 대충 점수야 나오겠지. 6단계의 Level중에서 Level 5가 적당하단다.

그러나 그러면 수업진도 따라가느라 가랑이 찢어질 염려가 있다. 내가 내 실력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Please, down the Level. I want learn in Level 4". OK다. 그 다음은 다른 남자에게 인계되었다.

이름이 John이라고 소개하는 금발 콧수염의 중년 사내이다. 이것저것 묻는데, 다행히 천천히 얘기를 해주어서 영어가 몇 마디 들린다. 내 영어야 어차피 단어퍼즐수준이지만 다행히 알아 먹어주니 기분이 좋았다.

10분간 휴식 중에 다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정신을 가다듬은 후에 1교시 수업에 참가하였다. 이미 7, 8명이 와 있었다. 맙소사! 그런데 모두들 대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애들이다.

한 여자가 지나가면서 "Are you a Japanese?"라고 묻는다. 쳐다보니 당연히 일본 애다. "No, I'm a Korean" 강경하게 대답했다.

나까지 참가함으로써 강의실이 너무 좁다. 강사가 들어와서 조금 넓은 강의실로 옮기자고 한다. 강의실에 들어가서 간단히 내 소개를 했다. 특별히 준비한 건 없고 "Let me introduce myself"로 시작하여 이름 국적, 근무지, 여기 온 목적, 앞으로 많이 도와 달라고 말하고 "Thank you."로 끝나는 전형적인 인사말을 했다.

박수를 받으니 쑥스럽다. 나까지 포함하여 9명이다. 터키에서 온 남자애를 제외한 나머지는 여자, 강사인 Sue도 여자이니 완전히 꽃밭이다. 나머지 사람들도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일본애가 둘, 폴란드, 짐바브웨, 터키, 독일, 나머지 둘은 모르겠다. 이름은 도저히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첫 시간 수업이 시작되었다.

분위기가 상당히 자유스럽다. 내 앞에 앉은 일본 애가 분위기를 많이 주도한다. 모두들 자신감 있게 수업에 임하는데 나만 약간 처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중간에 읽기를 하는 부분이 있어서 들어보니 발음들이 정말 엉터리다.

갑자기 자신감이 붙었다. 어차피 전부 영어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내가 뭐라고 하건 무슨 상관이랴. 그 다음부터는 생각나는 대로 얘기하며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다만 Listening 부분은 아무래도 내가 좀 약했다. 강사 Sue says "한국 사람들은 Listening이 좀 약한데 다른 부분들은 아주 잘 하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곧 엄청난 영어실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의미로 얘기를 했으리라 추측하고는 "Thank you, I really expect it" 라고 대답했다. 아무도 웃지 않는 걸 보니 내 짐작이 맞았나 보다.

강의가 끝나고 Sue가 물었다. 첫 수업 소감이 어떠냐고. "Very interesting and fun!" 당연하지 꽃밭인데 수업 후 Margaret를 만나서 출입증을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서류를 꾸며 주며 Main gate로 사진 두 장을 가지고 가서 만들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매우 친절한 사람이다.

점심식사는 Beef Stake를 먹었다. 욕심을 내어 다른 이름 모르는 종류도 하나 얹어서 먹었더니 너무 배가 부르다. 식탁에 앉으려는데 아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첫날 식사할 때 앞에 앉고, 내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 흑인이다. 그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다.

Language Course 첫 강의를 듣고 온 덕분인지 말을 주고받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온 대학생으로 27살이며, 2년 4개월 동안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단다. 이번 6월 달에 학위를 마치면 귀국할 예정이란다. 넬슨 만델라를 아느냐고 묻길래 당연히 알고 있으며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매우 기분 좋아했다. 점심식사 후 Main reception으로 가서 Pass를 만들었다. 이제는 이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되는 거다.

기숙사로 돌아와 시설물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사우나실이 있고, 당구대 비슷한 게 있다. 그리고 TV room이 두 곳이 있다. 여기 영국은 License가 있어야 TV를 소지할 수 있다네요. 정말 이상한 나라군. 하여튼 첫 수업에 신경 좀 썼더니 피곤하여 BBC방송을 들으면서 좀 쉬었다.

앞으로 집을 구하고, 차도 사고,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지만 일단 오늘은 조금 쉬고 내일 수업이 끝난 후에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다. 방에 들어와서 한국에서 가지고 온 'Friends'를 세편 보고서 여섯시부터 운동을 했다. 체력이 국력이라고 했다. 앞으로 아침에 30분, 저녁에 30분은 반드시 운동을 하기로 하자.

기숙사를 돌아서 JSCSC건물까지 도니까 3Km정도 되는 것 같다. 두 바퀴 정도 도니 30분 정도 걸린다. 이 정도가 지금은 알맞겠다. 기숙사로 들어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했더니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이 황량한 생활도 조금씩 적응이 되어 가나보다.

하긴 나는 사실 이렇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경험을 해 본 적이 많다. 국민학교 졸업 후 중학교부터 자취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수시로 사는 곳을 옮겨 다녔다.

고향마을에서 중학교를 다니기 위해 면 소재지인 읍내로 갔을 때도,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제천시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할 때도, 청주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도, 학사장교로 영천의 3사관학교에 입교했을 때도 지금과 거의 같이 곁에 아무도 없이 혼자인 상황이었다.

내가 고향마을을 떠난 13살 이후로 가장 오래 한곳에 살아본 기억이 군 제대 후 안양의 반 지하 전세방에서의 5년으로 기억된다. 언젠가 중학교 때부터 사는 곳을 옮긴 기억을 더듬어 보니 무렵 26번이었다. 이제 거기에 한번을 더하는 것이니 별로 이 상황이 나에게 새로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이 혼자 낯선 곳에 뚝 떨궈진 느낌. 그러나 언제나 그 상황에 적응을 하였었고, 생각해 보면 나는 오히려 이런 상황을 나름대로 즐기는 것도 같다.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내 인생을 풍부하게 해주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었다고 생각된다.

이번에는 언어라는 무시못할 장애물이 있지만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나도 어느 정도 다듬은 삶의 경험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으니 이번에 맞이하는 세계도 빠른 시간 안에 내 것으로 만들리라. 처음 이 방에 들어올 때의 그 외롭고도 황량한 느낌은 이제 가구들이 하나씩 눈에 익어가고, 그 가구에 정리된 나의 소지품들이랑 옅게 배어있는 담배냄새를 맡으면서 인간의 무서운 적응력에 대한 경외감을 다시 한번 느낀다.

저녁식사 후에는 피곤감이 몰려왔다. 이제 시차에 적응했다는 표시이므로 다행이라는 생각에 그냥 침대에 들었다. 카세트를 틀어 놓고 30분도 못되어 잠이 들었다. 좋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