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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독서생활

여정의 독서 :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씨 이야기>

by 무딘펜 2022. 10. 22.


나는 길을 걸으며 글을 쓴다. 글이라고 해서 뭐 대단한 작품을 쓰는 게 아니라 내가 본 것, 내가 생각한 것들을 짧은 단상으로 남기는 것이다. 여행의 장면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내 글도 앞 뒤가 맥락없이 마구 넘어 간다. 어떠면 나는 길을 걸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과 나의 생각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나의 여행방식대로 책을 읽어보고자 한다. 죽 읽어가면서 맘에 드는 구절에 대하여 옮겨 적거나 내 생각을 두서없이 적어보는 방식이다. 그 동안 내가 고수했던 독서 스타일과는 약간 다른 방식이라 어떻게 진행될 지 나도 궁금하다. 일단 시도해 본다.

1. (작가 쥐스킨트는 누구인가)
벗겨진 머리가 나와 닮은 은둔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라는 다소 독특한 소설로 내게 인상을 준 작가다. '지상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스물 다섯 차례에 걸친 살인도 마다않는 주인공 그루누이의 악마적인, 그러나 한편으로 천진스럽기조차 한 짧은 일대기'.

향수로 세상을 지배한다? 정말 기상천외한 발상이다.


2. (나는 왜 이 책을 집어 들었는가?)
좀머씨. '평생을 사랑과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별난 사람'. 이 소설을 두세 번 읽은 것 같은데 줄거리가 가물가물하고 내가 뭘 이해하면서 읽었는지 잘 모르겠다. 요즈음 들어 하염없이 걷기를 즐기는 생활을 하면서 걷기에 미친(?) 좀머씨에 관심을 갖게 되어 다시금 이 책을 읽어 보고자 한다.

또한 책 읽는 과정을 생중계하듯이 기록하는 방식을 시도해 보기에 너무 두꺼운 책은 부담스럽다. 125페이지. 이 정도면 한번 해 볼만 하다.


3.
이 책의 삽화는 '장 자크 상페'라는 사람이 그렸다. 대부분 그림에는 위의 책 표지처럼 어디론가 하염없이 걷는 좀머씨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 책을 언제 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초판 30쇄가 1996년 7월에 나왔으니 아마 20세기 말 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125 페이지 짜리 얇은 책이고, 요즘은 잘 쓰지 않는 예전 국민학교 국어책에 사용하던 활자체로 인쇄되어 있다. 오랫만에 이런 활자를 읽으니 정겨운 마음도 든다.


4.
이 소설의 첫 부분은 나무타기를 즐기던 주인공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한다.

다음 구절은 잘 읽어보면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나무에 오르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도 오르기보다는 내려오기가 훨씬 힘들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무에 기어오르는 것도 그것과 비슷한 경우다. 위로 기어오르는 것은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다. 눈으로 나뭇가지를 쳐다볼 수 있고, 손으로 만져 볼 수도 있으며, 잡고 올라가기 전에 그것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시험해 보고 다리를 그 위로 걸터 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밑으로 내려올 때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한 발을 내려 딛기 전에 거의 장님이나 마찬가지로 밑에 있는 가시덤불 사이를 발로 헤쳐 보아야만 한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그렇게 내려올 때 밑에 있는 가지는 튼튼하지 않고 썩어 있거나 미끄러워서 사람들이 미끄러지거나 가지째 부러지며 떨어지기 일쑤다."(p.10)

가끔 책을 읽으며 소설 속에 표현된 문학적 의미를 곱씹어보는 대신에 눈을 크게 뜨고 교훈의 말을 찾아보는 훈장 선생님 비슷한 버릇이 나에게는 있다. 이해하시라.

5.
"이제까지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심하게 떨어졌던 경우는 역시 같은 해인 국민 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높이가 4.5미터였던 전나무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갈릴레이의 낙하 법칙대로 떨어졌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낙하 거리는 가속도 곱하기 시간의 제곱을 한 것의 2분의 1이라는 법칙(S=1/2g-t2)에 따라서 정확히 0.9578262초가 걸렸다. 대단히 짧은 시간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스물 하나에서 스물 둘을 세려고 할 때 걸리는 시간보다도 짧은 것이었으며, 스물 하나를 제대로 발음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도 짧은 것이었다."(p.10)

나는 책을 읽으며 이런 구절에 크게 흥미를 갖는다. 학창시절 유난히 수학과 물리에 약해서 그 보상으로 이런 수치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류의 표현은 내가 최애하는 작가 알랭 드 보통(그 역시도 대머리임을 기억해 달라)의 글에서 자주 발견한다. 때로는 본론에서 벗어나 횡설수설하고, 너무 옆으로 많이 새는 것 아닌가 우려스럽기도 하지만 이런 깊이있는 잡생각에는 경의를 표하게 된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을 펴들고 그 구체적인 예를 보야주고 싶긴 하지만 그건 너무 나가는 것 같아서 이 정도로 매듭짓는다.

6.
이 구절을 읽으면 한참을 회상에 잠기곤 한다.

"아직 나무 타기를 좋아했던 시절에, 사실 나는 매번 떨어지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자주 나무를 탔으며 또 잘 탔었다! 어떤 때는 밑둥에 가지가 없어서 미끈한 줄기만을 잡고 올라가야만 되는 나무도 잘 탈 수 있었고, 한나무 위에서 다른 나무의 가지로 옮겨갈 수도 있었으며, 나무 꼭대기에 걸터앉을 수 있는 의자를 수도 없이 만들어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한번은 숲 한가운데에서 지상 10미터의 높이에 창문과 바닥과 천장이 있는 진짜 집을 직접 지었던 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유년기의 거의 모든 시절을 나는 나무 위에서 보냈었던 것같다."(p.13)

우선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동네에는 한쪽 다리에 장애가 있는 형이 있었다. 한쪽 다리로 심하게 절룩대면서 걷기도 했지만 빨리 움직여야 할 때에는 두 다리 대신 한 쪽 다리와 양쪽 팔을 이용하여 이동하였는데 보통 사람들의 걷는 속도에 못지 않았다. 책보를 성하지 않은 다리에 걸치고 나머지 다리와 팔로 친구들과 함께 아무렇지 않은 듯이 등교하던 모습, 함께 가이생을 하면서 누구보다 억센 팔로 끝까지 살아남던 그 기세등등한 모습,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나무를 잘 타서 종종 높은 나무 꼭대디에 올라가 새알을 꺼내어 내려오며 의기양양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단 한번도 그 형이 기죽어 지내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동네에서는 기죽지 않고 당당하던 형이 세상에서도 제발 그렇게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어린 시절에 나무타기나 나무 위에 집짓기를 즐겼는데, 아이들이랑 전쟁놀이를 하면서 우리편 본부라고 며칠에 걸쳐서 나무 위에다 집을 지어놓고 그곳이 너무 자랑스러워 매일 그곳에서 살다시피하던 적도 있었다. 이것도 얘기하면 끝이 없다. 이 정도만. 나는 지금 책을 읽는 중이다.

7. (이어서 나오는 좀머씨에 대한 표현을 살짝 요약해 본다.)

겨울이면 뻣뻣해서 무슨 큰 껍질같은 외투에 고무장화를 신고 빨간 털모자를 쓰고 다니며, 여름이면 캐러멜색 린네르 셔츠와 같은 색 반바지에 밀짚모자를 쓰고 다녔다. 길고 약간 구부러진 호두나무 지팡이와 버터빵, 우비가 든 배낭하나만 메고 하루에 길면 16시간씩 주변을 빠른 속도로 걸어다니고 있었다.

좀머 씨가 전쟁 후 이 마을에 올 무렵에는 다들 그처럼 걸어다녔지만 이후 버스가 다니고 세상은 변했지만 그는 아무 볼일도 없이 누구보다 열심히 걸어다녔다.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몇 마디를 중얼거리면서.

8.
주인공이 아버지와 경마장에 가다가 갑자기 폭우를 만난다. 눈에 보이듯이 생생하게 장면을 묘사한 이런 구절은 참 좋다. 약간 발췌하여 적어 본다.

"곧바로 산자락에서 돌풍이 휘몰아쳐 내려 오더니 주변의 넓은 옥수수밭을 휘감고 지나갔다. 그것은 들판을 빗질하는 모습처럼 보였고, 잔풀더미를 뒤흔들며 위협하는 모습같기도 했다. 거의 동시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빗방울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포도송이만큼 큰 물방울이 아스팔트의 이곳저곳과 자동차의 보닛과 앞유리창에 사정없이 내리꽂히며 부서져 내렸다. 자동차는 마치 고랑을 치듯이 물 속을 가로질렀고, 양쪽으로 물이 분수처럼 솟아올라서 마치 물로 벽을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와이퍼가 부지런히 왔다갔다하기는 했지만 앞 유리창을 통해 본 바깥 풍경은 투명한 물 속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았다.

빗줄기는 차츰 우박으로 변했고, 그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후둑후둑 떨어지는 더 요란한 소리로 변해서 그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자동차 속은 마치 어떤 거인이 마구 두드려대는 큰 팀파니 통 속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고, 그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 추위에 떨면서 침묵을 지킨 채 우리를 보호해 주고 있는 안식처가 부서지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p.30~)

9.
아버지는 틀에 박힌 빈말을 혐오한다. 그러나 자신이 좀머씨에게 그 빈말을 사용한다. - '그러다가 죽겠어요'

「틀에 박힌 빈말이라는 것은 너희들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야 어중이떠중이들이 입이나 펜으로 수도 없이 많이 사용했던 말이라서, 그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실제로 그렇단다.」
그런 말을 우리에게 할 때 아버지는 대개 좀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렇게 덧붙이곤 했다.

「그런 것들은 〈차를 한 잔 마시세요. 그러는 게 몸에 좋을 거예요>라든가 <의사 선생님, 환자의 상태가 어떤가요? 환자가 이겨낼 수 있을까요?> 등의 말들처럼 아무 의미도 없는 쓸데없는 말들이다. 그런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니라, 질 나쁜 소설이나 터무니없는 미국 영화에서 생겨난 말들이니까 그런 말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p.36)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말이 아닌, 너무 많은 이들이 아무 의미없이 사용함으로써 이젠 그 진정한 의미가 닳고 닳아서 그 말을 하는 것이 진정한 나의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 우정, 국민, 민주주의... 우리는 왜 그 소중한 말을 생각없이 함부로 소비하여 그 아름다움을 훼손하고 있는가.

말의 진부함, 일상의 진부함을 혐오한다. 陳腐 - 묵어서 썩은 것을 이른다. 오래 묵으면 맛이 올라가고 향기가 넘쳐나는 것이 있는 반면이, 썩어서 악취가 풍기는 것이 있다. 말도 그러하다. 말은 그 쓰임이나 쓰는 사람에 따라 향기가 달라진다. 딱 잘라 말할 수야 없겠지만 시인이 쓰면 오래 묵힌 포도주가 되고, 정치가가 쓰면 부두에 팽개쳐진 생선이 되는 게 말이 아닌가 싶다.

10.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이 장면이 이 소설에서 암시하는 바가 큰 것 같은데 끝까지 읽기 전까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이 구절이 갑자기 다른 소설을 떠오르게 한다.

<필경사 바틀비>. 그러나 그 책 역시도 정확한 내용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독후감까지 썼던 책으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나는 도대체 천권의 책을 어떻게 읽고 있었던 것인가.

"그 말에 아저씨가 우뚝 섰다. 내가 보기에 그는 바로 <죽겠어요>라는 말에서 빳빳하게 굳어지며 멈춰 서는 것 같았다. 그것도 너무 갑작스럽게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그의 옆을 지나치지 않으려고 급 브레이크를 밟아야만 했다. 아저씨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호두나무 지팡이를 손으로 바꿔 쥐고는 우리 쪽을 쳐다보고 아주 고집스러우면서도 절망적인 몸짓으로 지팡이를 여러 번 땅에 내려치면서 크고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그 말뿐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 말 뿐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때까지 열려진 채였던 차의 앞문을 닫고, 지팡이를 다시 오른쪽으로 바꿔 쥐고는 눈길을 옆으로 주지도 않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앞으로 계속 걷기만 했다.
「저 사람 완전히 돌았군.」
아버지가 혼자말처럼 내뱉었다."(p.37)


11.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기보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틀 속에 끼워넣어서 억지로 누군가를 정의하려는 오만함은 얼마나 큰 폭력인가. 다른 이의 주장을 듣기보다는 자기의 아는 지식을 줄줄이 늘어 놓는 버릇은 마치 나를 보는 것 같다. 잘났어 정말!

「좀머 씨는 밀폐 공포증 환자야.」
어머니는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지독히 나빴던 일기 변화와 낮에 좀머 씨를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그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밀폐 공포증이 아주 심하단다. 그 병은 사람을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게 만들지.」

「밀폐 공포증이란 엄격하게 말하자면………」
아버지가 말했다.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을 끊었다.
「사람이 자기 방에 앉아 있지도 못하는 거예요. 룩흐터한트 박사님이 자세하게 설명해 줘서 내가 잘 알고 있다구요.」

「〈밀폐 공포증 Klaustrophobie>이란 말은 원래 라틴어와 그리스 어에서 유래되었지.」
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룩흐터한트 박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겠지만 말이야. 그 말은 실제로 <밀폐claustrum〉라는 말과 <공포증phobia〉이라는 두 단어가 합해진 단어인데, <밀폐〉란 <닫음>혹은 <고립>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서, <밀폐 공간>이라는 단어라든가 혹은 <밀폐〉라는 뜻을 가진 도시 〈클라우젠, 또는 이탈리아의 <키우사Chiusa, 프랑스의〈보클뤼즈Vaucluse〉처럼 그 말에도 〈밀폐〉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거야. 너희들 중에 누가 <밀폐〉라는 뜻이 숨어 있는 낱말을 말해 볼 수 있겠니?」(p.39)


가족들의 한바탕 토론이 끝난 후 잠자리에서 이어지는 주인공의 다음 생각이 어쩌면 내가 찾던, 그리고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아닐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소설이 진행 중인 아직은 맘 속에 '이것이다' 하고 강렬하게 와 꽂히지는 않는다. 좀 더 읽어 보아야겠다.

나는 좀머 아저씨가 아무 병에도 걸리지 않았고,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강요도 받지 않고 있으며, 단지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내가 나무를 기어오를 때 즐거움을 느끼듯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모두 자기 자신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서 좀머 아저씨는 밖에서 걸어다니는 것뿐이고, 거기에 다른 설명은 필요치 않은 것 같았다.(p.44)

12.
주인공이 말하는 좀머씨의 이런 얼굴 표정은 도대체 어떤 표정일까? 무엇에 대한 갈망인지, 그리고 얼마나 큰 갈망이기에.

생각해 보면 그것은 빗속에 있으면서도 호수의 물을 다 들이킬 것 같은 갈증을 느끼는 표정 같기도 했다.(p.45)

13.
이 소설은 별도 목차가 있진 않지만 6개 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세번째 장의 제목을 내가 붙인다면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이다.

주인공이 같은 반에 있는 카롤리나 퀵켈만이라는 짝사랑하는 여자애와 자기 마을까지 단 둘이 걸을 찬스를 맞아 그것을 준비하는 설레임, 그리고 일이 틀어져 혼자 쓸쓸히 집으로 가면서 멀리로 좀머씨의 걷는 모습을 보게 되는 줄거리이다. 이야기가 좀머씨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고 갑자기 주인공 위주로 흘러가서 약간 당황스럽긴 하다.

참고로 주인공이 회상하는 시절, 즉 폭우속에 좀머씨를 만나고, 퀵겔만에게 차이고, 미스 풍켈에게 혼나고 자살을 결심하는 때에 그의 나이가 일곱살 또는 여덟살,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나이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읽어가는 것이 좋겠다.

하여간 주인공이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하고 준비했는지만 살펴보자. 소나기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내 어릴 적의 말 꺼내기에 쑥스러운 추억이 생각나기도 한다. 헤어질 때 드라이버를 선물로 주려고 준비하는 부분에서는 푸훗!하고 웃음이 나온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서 걸으면서 카롤리나에게 들려줄 두 가지 이야기를 다시 연습해 보고, 미리 예정된 내일의 일정을 세밀하게 검토하였다. 수도 없이 1)번에서부터 6) 번까지 거쳐가야 할 장소를 생각해 보았고,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물건인 드라이버를 건네줄 순간도 되뇌어 보았으며, 이미 바깥 숲 속 한 나뭇가지 위에서 우리를 고대하고 있는 구두 상자 안의 물건들도 머리 속에 떠올려 보았다. 그보다 더 철저하게 랑데뷰를 준비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런 다음에야 나는 달콤한 말을 기억하며 마침내 잠에 빠져 들었다.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p.53)

읽다보니 내가 잘 모르는 내용이 나온다. 그림형제 동화책에 나오는 건가. 그냥 참고로 적어둔다. 룸펠스틸첸 요정은 누구고 한스와 루스틱형, 황금산의 왕이 누구인지 궁금하긴 하다.

<오늘은 빵을 굽고, 내일은 고기를 굽고, 모레는 왕비님께 아기를 갖다 바쳐야지!>라고 말했던 룸펠스틸첸 요정처럼 조바심을 내며 날짜를 세었다. 마치 내 한 몸 안에 행복에 젖어 있는 한스와 루스틱 형과 황금 산의 왕이 다 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p.51)

14.
자전거 배우기에 대한 구절은 내 어릴 적 경험과 연결되어 머리에 쏙 들어온다. 내가 겪은 일과 99% 일치한다.

나는 사실 자전거 타기를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다. 가는 두 개의 바퀴 위에서 계속 움직인다는 것이 내 생각으로는 너무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환상적인 현상에 가장 기초적인 자연의 법칙, 즉 원심력과 특히 소위 <기계적인 회전 충격 보존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그 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으며, 〈기계적인 회전 충격 보존력〉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혼란스럽고 어지러워서 뒤통수의 상처 자국이 근질거리거나 쿡쿡 쑤셔오곤 한다.(p.64)

언젠가 수도 없이 실패한 다음 거의 기적적으로 갑자기 바퀴를 굴릴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론적인 내 모근 고민과 고집스러운 의심은 두 바퀴 사이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p.70)

자전거가 두 바퀴 만으로 달린다는 건 사람이 두 발로 걷는 것 만큼이나 신기한 일이다. 나는 자전거를 또래보다 늦은 중학교 때 배웠다. (주인공이 자전거 타기를 배운 건 여덟살 무렵이니 그 작은 덩치에 다리도 제대로 닿지 않는 커다란 자전거 타기를 배우기에는 나보다 훨씬 어려웠겠지만. 뒤에 그런 어려움이 자세히 나온다.)

밤늦은 학교 운동장 경사진 곳에서 눈을 질끈 감고 페달에 올린 발에 힘을 주면 자전거는 몇 미터 전진하다가 기우뚱하며 옆으로 쓰러지기 일쑤였다. 열 번인지, 스무 번인지 넘어져서 이제 넘어지는 요령을 터득하고, 넘어지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게 생각될 즈음 나는 어느새 두 바퀴로 달리고 있었다. 얼마나 신기하고 자랑스럽던지. 실패가 두려워지지 않을 무렵에 성공은 슬며시 찾아오는 법이다.

아마도 아기들이 처음 걸음마를 할 때도 표현은 못하지만 같은 마음이리라. 다만 아기 자신보다 부모들이 더 대견하고 자랑스러워하지만 말이다. '기계적인 회전 충격 보존력'에 대해서는 주인공 만큼이나 나도 골치아프니 그냥 넘어가자.

15.
늙은 노처녀 피아노 선생님 미스 풍켈과 같이 사는 호호백발 어머니는 '피와 살로 된 사람이라기보다는 가구라든가, 박제를 해놓은 나비라든가, 깨질 것 같은 얇은 구식 꽃병'같은 느낌이란다. 피아노를 잘 치면 상으로 과자를 주는데 그 장면의 묘사가 괴이하도록 세세하다. 뭐라고 느낌을 표현하기가 어려워 이 부분은 그냥 피해가도록 하겠다.

「걔한테 과자 하나 줘요, 어무니!」
그러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천천히 그물 모양의 명주천이나 검은색 비로드 천 어딘가에서 푸르둥둥하고 약간 떨리면서 가녀린 손이 나와 허공을 더듬거리다가, 눈을 뜨거나 거북이 머리 같은 머리를 돌리지도 않고 의자의 팔걸이를 지나 오른쪽 방향으로 손을 뻗어서 대개 안에는 크림이 들어 있고 사각으로 각이 진 비스킷으로, 의자 옆 작은 탁자 위 그릇에 담겨 있는 과자를 하나 집어들고, 다시 탁자와 팔걸이와 앞자락을 서서히 지나 내밀고 있는 아이의 손안에 뼈만 앙상한 손으로 마치 금덩어리라도 되는 양 건네주었다. 그때 아이의 손가락과 노인의 손가락이 아주 잠깐 스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아이는 뭔가 단단하고 차가운 느낌이 들리라고 생각했다가 오히려 따뜻하고 차라리 뜨겁기까지 하며 믿기지 않을 만큼 보드랍고 가벼운 살갗의 접촉에 등골이 오싹해 지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비록 짧지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는 새와의 접촉처럼 등골을 시리게 만드는 일이었다.(p.70)


16.
여덟 살 주인공은 덩치에 비해 안장이 높은 어머니의 자전거를 힘들여 타고 오다가 사납게 짖는 동네의 개를 피하느라 피아노 교습 시간에 10분 늦었는데 미스 풍켈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었다.

나는 하르트라웁 박사님 댁 개 이야기부터 더듬거리며 하기 시작했지만 선생님은 내게 변명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개라구!」
선생님이 이내 내 말을 끊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개하고 놀았겠지! 얼음 과자도 하나 사먹었을 테고! 너 같은 애들은 내가 잘 알고 있어. 히르트 아줌마네 구멍가게를 끊임없이 들락날락하면서 얼음 과자나 사 먹을 생각말고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그건 정말 너무한 처사였다. 내게 히르트 아주머니네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었다고 하다니! 용돈도 한푼 받지 않았던 나한테 말이다!(p.75)


여덟 살의 어린애가 늦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피아노를 배우러 왔다. 그런데 늦은 것에 대하여 그 이유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이렇게 억지스럽게 몰아붙이면 정말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겠다. 내가 더 답답하다.

어린 시절에도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하여 혼나는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돌아간다고 배우고, 또 그렇게 믿고 있는 어린 마음에 이렇게 부당하게 대접받는 일이 그 시절에 얼마나 큰 충격인지. 내 머리 속에 아름답게 그려지던 세상의 풍경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는기분이라는 걸 이제야 이해한다.

어쩌면 이런 아픔, 즉 세상이 마냥 아름답고 정당하며, 언제나 선이 악을 이기며, 착하고 정직하게 살면 그 보답을 받는다는 가르침이 말짱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꾸려가는 세상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순수하고 맑고 여린 영혼에게는 견디기 힘든 큰 사건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런 아픔은 몇 번을 겪으며 성장해 간다. 대부분의 성장 소설들은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전개하며, 우리는 그 부분에 적극 공감하며 이런 류의 소설을 읽는다. 데미안,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아홉살 인생...

누구나 이런 아픔을 겪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 불합리가 세상의 이치라고 믿어가는 사람은 성악설을 가슴에 품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결국 순리대로 돌아간다고 믿는 이는 성선설을 부여잡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또는 좋다, 나쁘다의 문제는 아니다. 이런 순간과 받아들임의 태도가 바로 우리의 가치관, 인생관을 결정하고 결국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다.

더 이야기를 끌어가면 아마도 책 한권이겠지. 이 정도에서 독서의 진도를 나가야 한다.

17.
내 어릴 적에는 악기를 배운다는 건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다. 유일한 악기는 선생님이 음악시간에 연주하는 풍금과 삼각형 모양의 트라이앵글이 전부였으니까. 당연히 나는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다. 기타를 한 두번 도전을 해 보았지만 손가락을 사정없이 찢어야 하는 F코드에 막혀 중도에 포기한 게 전부다.

그렇지만 악기 배우기를 아직 포기한 것은 아니다. 기타는 곧 다시 시작을 할 것이고 피아노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의 반주를 넣을 정도까지는 반드시 배울 것이다.

그나저나 책에 나오는 '푸가'(이게 뭐꼬? 나는 음악과 미술에 엄청 약하다. 수학도)형식의 저 곡은 무척 어려운 것인가 보다.

다른 한편으로는 숙제로 내주었던 연습곡이 카논 형식의 푸가형태여서 오른손과 왼손을 옆으로 쫙 벌리고 치다가, 가끔씩 한 손은 이쪽에 다른 한 손은 저쪽에 두면서 쳐야 했고, 서로 불협화음을 이루는 리듬과 특이한 음정을 지키면서, 높은 음에서 귀에 몹시 거슬리는 소리까지 내야 되는 등 굉장히 어려운 것이라서 거의 연습을 하지 못했다. 작곡가는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헤쓸러라는 사람이었다. 악마가 있어서 그 사람을 잡아 갔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p.76)

18.
어른이건 아이건 다그친다고 잘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적을 많이 할수록 그 부분에서 기죽어서 잘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뻔해! 조금만 어려운 게 나와도 금방 틀려 버리지! 넌 눈도 없니? 올림 바잖아! 여기 이렇게 크고 확실하게 씌어 있잖아! 똑똑히 보라구! 다시 한번 처음부터 해! 하나둘셋넷……….」

내가 왜 두 번째도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는지는 오늘날까지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아마도 곡 전체를 올림 바음으로만 치고 싶을 정도로 음표마다 올림 바음을 치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스스로에게 억지로 강요하면서 올림 바를 치지 않을 것을 무진장 노력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직 올림 바를 치면 안돼, 아직 아냐…. 아직…. 그러다가 이미 잘 알고 있었던 부분에서 그만 올림 바 대신 바 음을 눌러 버렸던 것이다.(p.80)


흰곰효과라는 걸 아시는지. 30년 전 한 사회 심리학자가 간단한 인지 실험을 진행했다. 피실험자들에게 5분 동안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하며 그럼에도 흰곰을 떠올렸다면 종을 울리게 했는데, 그 결과 피실험자 누구도 흰곰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떤 생각을 억제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를 증명한 ‘흰곰 효과’다.

작은 딸이 학교 다닐 때 손톱을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다. 지적하고 야단칠수록 버릇은 오히려 심해졌다. 내심 포기하고 더 이상 질책을 하지 않은 어느날부터 그 버릇이 사라졌다.

다른 사람을 다그치는 것도 나쁘지만 자신을 억지로 통제하려고 하는 것도 좋지 않다. 우리의 마음에는 자연스런 끌림과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그 물꼬를 부자연스럽게 산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건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심스레 파악을 해보아야 한다. 손톱을 물어 뜯는 것이 원하는 게 아니다. 그 근원에는 다른 뭔가의 욕망이나 불만이 있을 것이다.

19.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가 가장 인상적으로 푹 빠져서 읽게 되는 장면이 있다. 내게는 이 장면이다. 지저분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 긴장감이 살떨리게 하는 장면이다. 꽤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올림 바 건반을 쳐다보던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 건반의 앞쪽 끄트머리에 미스 풍켈 선생님이 재채기를 할 때 콧털에 붙었다가, 그곳을 훔쳐낼 때 둘째손가락으로 옮겨 붙었다가, 둘째손가락에서 올림 바 음 건반으로 옮겨 붙어 크기가 손톱만 하고, 굵기는 거의 연필 굵기만 하며, 벌레처럼 휘어진 데다가 녹황색으로 영롱하게 빛나기조차 하는 끈적끈적한 코딱지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
선생님이 어금니 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하나둘셋넷…………」
우리는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후의 30초는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고역스러운 시간이었다. 나는 내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다는 것과, 두려움으로 인해 배어 나오는 땀방울이 목 언저리에 맺히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머리카락은 빳빳하게 섰고, 귀는 한 번은 차가웠다가 한 번은 뜨거웠다가 하더니 결국에 가서는 뭔가로 막혀서 귀머거리가 된 것처럼 안톤 디아벨리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악보도 보지 않은 채 두 번의 반복으로 저절로 굴러가는 손가락을 따라 기계적으로 쳐 나갔다. 오로지 내 시선은 마리아 루이제 풍켈 선생님의 코딱지가 붙어 있는 사 음 밑의 가는 검은 건반에만 고정되었다.…. 이제 일곱 마디만 지나면, 아직 여섯 마디만…. 물컹한 코딱지를 누르지 않고는 그 건반을 도저히 누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제 다섯 마디, 이제 네 마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올림 바음 대신에 그냥 바 음을 치는 짓을 세 번째로 한다면, 그렇다면…. 이제 겨우 세 마디 - 오, 하느님 기적을 이루소서! 무슨 말씀이라도 하소서! 무슨 행동이라도 보이소서! 땅을 쩍 갈라지게 만드소서! 올림 바 음을 칠 필요가 없게 시간을 거꾸로 돌려 주소서…. 이제 두 마디, 이제 한 마디….

하지만 하느님은 침묵을 지켰고 아무 행동도 보이지 않았으며 마지막 끔찍스러운 마디의 순간은 도래하였다. 그 마디는 - 아직도 내가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 라 음에서부터 올림 바음까지 이어지는 여섯 개의 8분의 1 박자를 치다가 그 위에 있는 사음의 건반을 4분의 1 박자로 치고 끝맺는 것이었다… 마치 황천길을 가듯이 내 손가락이 8분의 1 음표 계단을 비틀거리며 내려갔다…. 라-다-나-가-사….

「올림 바!」
옆자리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나는 정신이 멀쩡한 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죽는 것조차 무섭지 않다는 듯이 바 음을 쳤다. 내가 가까스로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빼내자마자 피아노 뚜껑이 꽝 소리를 내며 닫혔고, 내 옆자리에 있던 미스 풍켈 선생님은 악마처럼 펄펄 날뛰었다.
「너 그거 일부러 그랬지!」
꽥하며 지르던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그 소리는 귀머거리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내 귀 속을 파고들었다.
「고의로 그렇게 한 거야, 이 괘씸한 놈! 건방진 놈, 못된 놈! 버리장머리 없는 쓰레기 같은 놈...」(p.81~84)


사람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가 있을테니 나의 느낌을 부연하여 다른 이의 느낌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다만 주인공이 일부러 바음을 쳤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펄펄 뛰는( 다음 장면에서 접시에 있던 사과를 집어 들어 어머니 머리 위의 벽에다 터져버릴 만큼 세게 던져 버릴 정도로) 미스 풍켈도 이해되고 코딱지를 피하려는 주인공의 필사적인 마음도 이해된다. 재미있는 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리라.

20.
미스 풍켈이 화가나서 어머니 머리 위로 사과를 던지자 노인의 반응이 재미있고 의미심장하다.

그러자 마치 누군가 작동 단추라도 누른 것처럼 칭칭 감겨져 있던 곳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 같더니 감고 있던 옷의 주름 사이로 노인의 손이 나와 자동적으로 오른쪽으로 돌아 과자 있는 쪽으로 뻗어 나갔다…

하지만 그것을 미스 풍켈 선생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나만 봤다. 대신에 선생님은 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손을 쭉 뻗으며 나가라는 손짓을 하면서 쇳소리를 냈다.
「네 물건 싸 가지고 꺼져 버려!」(p.86)


노인은 지금 상황을 전혀 알아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자기가 감지하는 어떤 신호든지 무조건 과자를 집어서 아이에게 상으로 주라는 메시지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삶이란, '살아있다'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숨만 쉬고 마치 하등동물처럼 기본적인 육체적 움직임을 조건반사적으로 하는 이에게 살아 있음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평균수명이 쭉쭉 늘어나서 고령사회로 바뀐 오늘날 노인문제는 사회 문제이기에 앞서서 개인의 문제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두 종류이다. 그곳에 놀러온 사람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놀러온 이는 상대적으로 어리고, 그곳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늙었다. 피상적이겠지만 놀러온 젊은이는 행복해 보이고, 그곳에 사는 늙은이는 불행해 보였다. 나이듦이란, 오래 사는 일이란 행복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일인가? 나의 미래는 어떠할까? 나는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약간 다른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왜 우리는 집에서는 불행해 보이고, 집을 떠나야 행복해 보일까, 그나마 행복해 보이는 척 할까?)

21.
주인공의 분노가 제대로 표출되고 있다. 어린아이의 마음이라 귀엽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나도 가끔씩 세상 전체를 향한 이런 원통함과 분노와 복수심에 불탈 때가 있어서 살짝 공감이 간다.

악보책을 잡고 자전거를 옆으로 밀고 가는 동안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생각들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나를 그렇게 혼란스럽게 만들고, 오한이 날 정도로 몹시 흥분하게 만들었던 것은 미스 풍켈 선생님의 난리법석이 아니었다. 매맞을 것과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감금이 무서워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뭔가를 두려워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보다는 이 세상 전체가 불공정하고 포악스럽고 비열한 덩어리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분노에 찬 자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못된 개의 잘못은 또 다른 문제였다. 모든 것이 다 문제였다. 어떤 것에 대한 예외도 없이 모든 것이 다 그랬다.

우선 제일 먼저 내게 맞는 자전거를 사 주지 않은 우리 어머니가 원망스러웠고, 어머니를 그렇게 하도록 만든 아버지가 그랬으며, 선 자세로 자전거를 타야 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몰래 나를 비웃었던 누나와 형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구역질나게 만들었던 하르트라움 박사님 댁 개의 똥도 그랬고, 호숫가 길을 꽉 메워 나를 늦게 도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산보객들도 그랬다. 푸가 형식으로 나를 괴롭히고 모욕스럽게 만든 작곡가 헤쓸러도 그랬다. 말도 안되는 억지로 내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올림 바음 건반 위에 구역질 나는 코딱지를 붙여 놓은 미스 풍켈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가 딱 한번 필요로 하였을 때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건만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어긋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모양만 지켜 보았을 뿐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세상 사람들이 자비롭다고 하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그런 모든 것들에게 의리를 지킬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세상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토록 비열한 세상에서 노력하며 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나말고 다른 사람들이나 그런 못된 악에 질식해 버리도록 두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들이나 잘 먹고 잘해 보라지!(p.86~87)


주인공은 드디어 자살, 즉 '나 스스로 삶과 작별을 고하기'를 결심한다. 오직 자살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역겨운 것들과 잘못된 것들을 다 일격에 격파하기 위해서 단지 <나 스스로 삶과 작별을 고하기>―그런 행동을 그렇게 고상하게 표현해도 된다면 -만 하면 된다는 상상이 웬지 마음을 편안하게 위로해 주었다. 홀가분한 마음 때문에 눈물도 그쳤고, 온몸이 떨리던 것도 진정되었다. 세상에 다시 희망이 있어 보였다. 다만 곧바로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당장 내게 다른 생각이 나기 전에 해치워야만 할 일이었다.(p.88)

그 심각성 여부는 별개이지만 자살할 마음을 가져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피아노 선생님한테 혼난 그까짓 일로 자살을 시도하느냐고 생각하지만, 다른 자살에도 그 근저에는 세상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살은 어찌보면 어떤 하나의 사건, 단순한 동기에서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세상의 순리가 내가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 다시 제대로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불안, 이 세상과 헤어지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삶'이라는 생각, 그리고 한편으로는 엉망인 세상에 대한 마지막 항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자살을 않고 산다는 게 용한 것인지, 비겁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자살할 맘이 전혀 없다.

22.
자살의 순간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하며 행복해 하는 주인공. 어린 아이다운 생각이라 생각하면서도 죽은 이후의 장례식 절차가 죽은 자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미 죽어 없어졌는데 문상을 했느니 안했으니가 평소 아무 안면도 없는 동쪽 끝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떠들썩하게 하니 말이다.

그리고 무덤가에는 카롤리나 퀵켈만이 서 있다가 내게 꽃 한 송이를 던지고는 마지막 시선을 꽂으며 너무나 고통스러워 허스키해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겠지.
「오, 내 사랑했던 사람아! 나의 유일했던 사랑아! 그 월요일에 같이 갈 것을!」

너무나 황홀한 상상이었다! 그들에 대한 생각이 나를 아주 행복하게 하였다. 나는 나에 대한 칭찬 소리로 가득할 입관부터 문상객 접대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새로운 절차에 따라 행사를 치르는 상상을 계속해 보다가, 급기야는 스스로 너무 감격한 나머지 비록 눈물까지 흘리지는 않았지만 눈에 이슬이 맺혀옴을 느낄 수 있었다.(p.93)


23.
이어서 주인공이 자살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할 생각이었다! 단지 언제 실행에 옮길 것인지만 결정하지 못했다! 아주 특별한 순간에, 어느 한 순간에! 나는 이렇게 무턱대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 지금 하자!>
결국 달리기 시합을 할 때나 물 속에 뛰어들 때 하는 것처럼 셋까지 세다가<셋>에서 뛰어내리기로 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두울………」

거기까지 세다가 눈을 뜨고 뛰어내릴 것인지 아니면 눈을 감고 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갑자기 세는 것을 중단해야만 했다. 나는 잠시 생각해 본 다음, 눈을 감은 채 숫자를 세다가 <셋>하는 순간에 눈을 그대로 감은 채 허공으로 몸을 날린 다음 떨어지는 순간에는 다시 눈을 뜨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 같은 것이 났다. 길에서 나는 소리였다. <탁 ―탁 —탁 —> 탁하는 뭔가 딱딱하고 리드미컬한 소리가 내가 숫자를 세는 속도의 두 배로 났다. 내가 눈을 뜨자 묘하게도 그 소리도 그쳤다. 그 대신에 뭔가 민첩하게 지나가는 소리와 나뭇가지를 헤쳐 나가는 소리, 동물 같은 요란한 헐떡임 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좀머 아저씨의 모습이 30미터 밑에, 그것도 내가 뛰어내린다면 나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저씨도 넘어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수직적인 위치에 나타났다. 난 나뭇가지를 손으로 꽉 부여잡고 움직이지 않았다.(p.96)


당연히 주인공은 자살을 포기한다. 아주 미세한 절차에 연연한다는 것은 사실은 그것을 실행에 옮길 자신이나 용기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귀엽지 아니한가.

훗날 주인공은 이렇게 생각할까, 좀머 아저씨가 내 목숨을 이어 주었다고. 그가 아니었으면 나는 그 때 진짜로 나무에서 뛰어 내렸을 거라고.

주인공이 나무에서 뛰어내리지 못한 이유는 뭘까? 일단 진짜로 죽을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 테고 그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뛰어 내린다면 나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저씨도 넘어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위치에 나타난 좀머 씨가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을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발만 더 쥐스킨트의 글을 따라 앞으로 나가보자.

24

좀머 아저씨는 세 번의 빠른 동작으로 밀짚모자, 지팡이, 배낭을 벗어 놓고는 침대에 눕는 것처럼 길게 다리를 뻗고 나무 뿌리 사이의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누워서 미처 쉬기도 전에 눕자마자 바로 일어서더니 깊은 한숨을 길게 몰아 내쉬었다.

아니 그것은 한숨이 아니었다. 한숨을 쉬면 뭔가 홀가분해지는 듯한 소리가 나지만 그것은 뭔가 고통스러운 신음에 가까웠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갈망과 절망이 엉켜서 가슴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깊고 참담한 소리였다.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중환자가 내는 끙끙 앓는 소리 같이 머리카락이 빳빳하게 서도록 만든 그 애절한 신음 소리는 아저씨를 홀가분하게 해 준다든가, 아저씨에게 안식을 준다든가, 단 일초라도 아저씨를 쉬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저씨는 금방 다시 몸을 추스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재빨리 빵과 물을 먹고는 서둘러 길을 떠났다)(p.97)


온몸이 부들 부들 떨렸다. 오한이 났다.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싶은 생각이 갑자기 싹 가셨다. 웃기는 짓거리 같았다. 난 내가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그까짓 코딱지 때문에 자살을 하다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던 내가 불과 몇 분 전에 일생 동안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을 보지 않았던가!(p.98)

주인공이 자살을 그만 둔것은 좀머씨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지 않을까?

'좀머씨를 홀가분하게 해 준다든가, 그에게 안식을 준다든가, 단 일초라도 그를 쉬게 하지 않는 애절한 한숨소리'를 듣고, '일생동안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을 보고서 스스로 삶과 이별하려던 마음을 접은 것이다.

자, 이 부분이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한숨소리와 도망을 어떻게 삶에의 애착과 자연스럽게 연결을 시킬 것이냐?

자살을 하려고 한강 다리에 올라갔다가 다리 아래에서 열심히 일하는 청소부 아저씨의 건강한 웃음을 보고 살고 싶었다는 이야기와는 결이 다르다.

좀머씨는 왜 그런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쉬며 온종일 돌아다니는 것일까? 작가가 약간 내비친 것처럼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일까? 혹시 삶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은 아닐까? 죽음이건 삶이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도망자의 모습이 어떻게 어린 아이에게 삶에의 의지와 의미와 희망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다음 장에서 좀머씨는 스스로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자신의 영원한 안식을 찾는다. 그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을 다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찾아다닌 게 아닌가.

앞부분의 폭우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차에 타라면서 "그러다가 죽겠어요." 라고 하는 말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그러니'라는 말은 문맥상 '이 폭우 속을 그렇게 걸어다니다가는 죽을 수도 있으니'라고 이해가 된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으니 그냥 내버려 두어 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본다면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자가 아니라 죽음을 찾아가는 자가 해야 마땅한 말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분명하게 '일생 동안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내가 혼란스러울 수 밖에.

물론 죽음도 삶의 연장선에 있다, 그 구분도, 경계도 불분명하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다라는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나로서는 이런 혼란스러움을 적당히 봉합할 수는 있지만 작가의 단정적인 단어 사용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찜찜하다. (독일어 원문이나 영어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결론은 이번 독서에서도 나는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지나간다.

사족으로... 걷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주인공이 처음에 생각한대로 좀머씨가 '단지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내가 나무를 기어오를 때 즐거움을 느끼듯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면 최고의 해피엔딩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25.
이제 5, 6년의 시간이 흐르고 키가 170센티로 훌쩍 큰 주인공이 열 세살이나 열 네살이 되어 고등학교 5학년(우리로 보면 막 중학교)에 올라가는 시기, 또는 사춘기에 접어드는 시기로 넘어간다.

사람들에게는 각자 다른 걱정거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가용이나 세탁기, 잔디밭의 스프링쿨러에 대한 걱정은 했어도 어느 늙은 별종이 어디에서 잠자리를 폈는지는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들은 말이라든가 텔레비전에서 본 것이라든가 히르트 아줌마가 새로 문을 연 셀프 서비스 가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좀머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좀머 아저씨는 가끔씩 사람들 눈에 띄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표현을 빌자면 세월 다 보낸 사람이었다.(p.101)


좀머 씨에게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원래 자기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생각해 보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경우가 자기의 일이 관련이 있는 한도 내에서이다.

내 인생을 꾸려가기에도 점점 더 복잡해지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이 늘어나는 요즘은 더욱 더 타인에 대한 관심은 줄어간다. 그러면서도 타인이 내게 관심을 가져주기만은 간절히 원한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타인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만큼 타인도 타인인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으니 관심이 고픈 것이다. 소위 관종병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난다. 나도 일종의 그런 증상을 보일 때가 많다.

설령 관심이 있다 해도 아주 피상적이다. 나의 외모나 소유물이나 직위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가끔 있었어도 내 마음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는 보지 못했다. 어쩌면 프라이버시라는 이름으로 누군가 타인의 마음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투덜대며 사는 것이 요즘 우리네 인생이니 도대체 뭘 어떻게 해달라는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론은 외로움이다.

좀머씨는 어떠했을까. 당연히 외로웠겠지. 더구나 그나마 가까운 부인이 죽은 후에랴. 그러나 그는 말한다.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외롭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는 현명하게도 타인의 관심과 간섭이 나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덜어내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냥 걷는 것으로, 고행하듯이 아무 생각없이 걷는 것으로 외로움조차 느끼지 않는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아 가려 했는지도 모른다. 외로움이란 근본적으로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에 기대지 않는 그 무엇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그가 죽기 전에 그것을 발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한다. 좀머씨 차원과는 다른 의미로 나 역시 세상 속에서는 외롭지만, 혼자 걸을 때는 외로움을 덜 느끼는 경우가 많다. 아니 어쩌면 그 속에 푹 빠져서 그것의 존재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26.
장렬한 최후... 할 말이 별로 없다. 내가 경험해 보지도 상상해 보지도 못한 장면이어서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길 위에서 꿋꿋하게 걷던 좀머씨는 물 속에서도 그 꿋꿋함을 버리지 않았다. 삶에 대한, 또는 죽음에 대한 그 무엇이 그를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호수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게 했던 것일까. 인간의 육체적인 약점과 인내심의 한계를 생각해 볼 때 저렇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죽음의 길을 가볍게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좀머씨에게는 삶이 엄청나게 무거웠던 것일까?

갑자기 아저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발씩 한 발씩 발걸음을 떼어놓으며 세 번째 발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지팡이를 앞으로 옮겨 찍고, 뒤쪽을 단호히 물리치면서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땅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목적지를 향한 아저씨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급함으로 호수 한가운데를 향하여 서쪽으로 반듯하게 걸어 나갔다.

어느새 물이 아저씨의 어깨까지 차 올랐고 다음으로 목까지 차올랐지만… 여전히 아저씨는 호수 안으로 전진해 들어갔다…. 그러다가 아마도 바닥이 고르지 못해서였는지 아저씨의 몸이 불쑥 솟구치며 물이 다시 어깨까지 닿았다... 그래도 아저씨는 그렇게 위로 솟구친 다음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가 물이 다시 목까지 찼다가, 목구멍까지 찼고 이어서 턱 위까지…. 그제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지만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지르지도 못했다. <좀머 아저씨! 정지! 뒤로!>라고 소리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곳에서 황급히 뛰어가지도 않았으며, 아저씨를 구할 수 있는 배나 뗏목 혹은 구명용 공기매트를 찾으려고 해 보지도 않은 채 저 멀리에서 가라앉고 있는 작은 점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아저씨의 모습은 사라졌다. 밀짚모자만이 동그마니 물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무지하게 길게 느껴지던 30초 혹은 1분이 지난 다음 몇 개의 물방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을 뿐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밀짚모자만이 아주 천천히 남서쪽을 향해 떠내려 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어둑어둑한 원경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오랫동안 그것을 쳐다보았다.(p.114~115)


27.
2주일이 더 지난 다음 리들 아줌마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기로 했고, 그후 몇 주일이 지난 다음 신문에 아저씨를 찾는 작은 광고가 아무도 그 사람이 좀머 아저씨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아저씨의 여권용 사진과 함께 나왔다. 사진에 좀머 아저씨는 검은색 머리에 숱이 많았고, 집요한 눈빛과 입술에는 확신에 차고 거의 뻔뻔스럽게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 밑에 처음으로 좀머 아저씨의 온전한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막시밀리안 에른스트 애기디우스 좀머.(p.117)

'집요한 눈빛과 입술에는 확신에 차고 거의 뻔뻔스럽게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미소'를 머금은 사내는 어찌하여 온 세상을 맨 몸으로 걸어다니다가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은둔 소설가로 이름난 쥐스킨트가 이런 부분에 대해 일언반구 알려주지도 않았을테고, 결국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좀머씨 이야기!

28.
나는 지금까지 좀머씨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내가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또 그렇게 철저하게 침묵을 지킬 수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나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들었던 그 신음 소리와 빗속을 걸어갈 때 떨리던 입술과 간청하는 듯하던 아저씨의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기억은 좀머 아저씨가 물 속에 가라앉던 모습이었다.(p.120)


좀머씨의 말과, 신음소리와, 마지막 모습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결국 마지막 페이지까지 와서 책장을 덮으면서도, 그리고 나름대로 책의 귀퉁이까지 샅샅이 뒤지면서도 나는 이 소설을 이번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다. 또 다음 기회가 있겠지.

29.
이 책은 <열린책들>에서 펴내었고 옮긴이는 유혜자 씨다.

옮긴이의 글에서 이 소설의 의미에 대해 실마리를 찾고 싶었으나 오히려 나에게 혼란만 가져다 주었다. 그래도 옮긴이의 시각을 몇 가지 적어본다. 번역하는 과정에서의 그 시간과 노고를 생각해 보면 이 분의 생각이 소설을 읽는데 참고가 될 수도 있으리라.

1) 이 책의 내용은 너무나 보드라워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런 악한 마음 없이 세상을 선한 마음으로 볼 수 있도록, 천사처럼 착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게 만들어 준다. 마치 신선한 공기를 만나면 그것을 힘껏 들여 마시고 싶어하듯, 책의 고운 회화적 이미지를 가슴 속 가득히 품어 보고 싶도록 만드는 그런 책이다. (p.124)

2)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생을 죽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만으로 살며 지내다가 결국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하고 그는 죽어 버렸다. 이승에 무수한 발자국만 찍고 다녔을 뿐, 사실 그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애초에 자기가 왔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 버렸다.

그는 사는 동안 오로지 자신이 되돌아가게 될 죽음에 대해서만 줄곧 생각하고 자연의 회귀질서에 철저하게 복종한 사람이다. 지독히도 순결하고, 극단적으로 완고하게 전생에서부터 저승까지 이어지는 인생길을 끝까지 <걸어서>가 버린 그가 살았지만 살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는 그가 나에게 던져 준 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살-아-라>였다.(p.125)


30.
내가 쓴 이글을 쥐스킨트가 읽으면 뭐라고 말할까. 어쩌면 그리 심하게 오독을 했느냐, 아니면 내 말뜻을 그리도 못 알아듣느냐.

몇 번을 읽어도 아직 작가가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그림을 생생하게 읽어낼 수가 없다. 독서는 작가와 독자의 대화라고 했다. 대화가 부족한 것이리라. 그러나 작가는 작품을 내어놓은 이상 내가 아무리 궁금한 것이 많더라도 그 사람에게서 답을 구할 수는 없다. 단지 작품 속에서, 씌어진 글자 이외에는 꿈쩍도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 작품 속에서만 답을 찾아 헤메야 한다. 그리고 내가 찾은 답이 유일한 답이 아니라는 사실도 가슴에 안고 가야 한다. 어찌보면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그렇지만 책에 씌어진 내용과 그로부터 스멀스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내 경험과 생각이 책의 내용과 버무려지면서 어느날 문득 그 의문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책들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은 답을 말해주는 책들이 아니고 질문을 던지는 책들이다. 그냥 질문이 아닌 우리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져준다. 그리고 그 질문이 왜 중요한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그런 책을 우리는 고전이라 부른다. 고전에는 답이 씌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답을 제시해 본다. 그러다 보면 그 책은 더 유명해진다.

답이 없기에 똑 떨어지는 답을 찾아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런 책은 정말 무가치해 보일 것이다. 뭔 말인지, 나는 답을 찾으려고 왔는데 질문만 던져대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답이 아니라 질문을 다시 곱씹어 보기 위해, 그리고 이번 독서에서도 끝끝내 찾아내지 못한 내 마음 속의 답을 찾기 위해 다시금 이 책을 만나게 될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