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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독서생활

서평] 여행이 은유하는 순간들 / 김윤성

by 무딘펜 2021. 3. 2.

1.
저자는 공무원이라고 하는데, 저자는 물론이고 같이 근무하는 윗분들도 상당히 합리적인 분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환경에서 가장 보수적이라 생각되는 공무원 조직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자기 개인적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휴가를 내어서 세계 각지를 다닌다는 것이 아직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달라지길 기대해 본다.

내가 맡은 일은 정해진 시간 내에 끝내고 남은 시간을 나 자신을 위하여 투자하는 것을 용인하는 조직이 개인을 위해서나 그 조직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 훨씬 더 낫다는 걸 많은 관리자들이 깨달았으면 한다.

2.
이 책의 제목인 <여행이 은유하는 순간들>이 무엇을 의미할 지 궁금했다. 다행히 다음 글귀가 그 답을 주었다.

"밀란 쿤데라는 사랑이 은유로 시작된다고 했다. 한 여자를 단지 좋아서 만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 여자를 시적 기억으로 아로새기는 순간 사랑이 된다고 했다.

나는 진짜 삶도 은유로 시작된다고 말하고 싶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살아내기 바빠서 삶의 은유를 잃었다. 정작 잘 산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상처투성이로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다. 이런 우리에게도 삶을 시적 기억으로 아로새기는 순간이 필요하다."(p.206)


나의 삶이 '시적 기억으로 아로새겨질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3.
많은 여행기들이 취하는 방식대로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 여행지를 단순히 소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저자가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곳 위주로 자신의 경험과 인상을 써내려간 책이라 훨씬 마음에 와닿고 집중하여 읽을 수 있었다.

나도 유학시절을 포함하여 세계의 꽤 많은 곳을 다녀봤지만 기록은 없고 사진만 잔뜩 갖고 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이 생산적이지 않듯이 여행기없는 여행은 흐릿한 기억이나 이미지로만 남을 뿐 내 삶에 기쁨과 도움을 줄만한 연료로 쓰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모아둔 사진들을 훑어볼 때마다 아직 숙제를 마치지 못한 듯한 찜찜함을 안고 있다.)

그래서 나의 지금까지의 여행을 돌이켜보고, 앞으로 계획하는 여행에 대하여 여행기를 쓰고 싶다. (아마 내가 책을 쓴다면 이 책처럼 쓰되 장소에 대한 설명이 붙은 사진이 조금 더 들어가지 않을까?)

4.
이 책의 또다른 인상 깊은 점은 단순한 여행기를 벗어나 '어, 이 부분 좋은데!' 싶은 멋진 글귀들이 많이 보여서 밑줄을 긋게 된다는 점이다. 몇 가지 모아 보았다.

"여행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남의 일상을 바라보면서 주관적이던 내 일상이 점점 객관적으로 다가왔다."(p.9)

"낯선 장소는 언제나 기억조차 아름답게 하는 마력이 있다."(p.56)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람으로 기억되기보다 길에서 만난 또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p.57)

"일상에서 관리받던 이틀은 그렇게 짧기만 했는데, 체르마트에서 관리받지 않은 이틀은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시간을 관리할 수 없었던 체르마트에서 이틀을 보내면서 어쩌면 우리는 안타깝게도 시간을 관리할수록 더 짧은 시간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58)


이 책과 같이 읽은 책은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라는 책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까지 12,000Km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맨몸으로 돌파한 사람의 땀으로 쓴 여행기... 두책을 동시에 읽게 된건 우연이지만 나에겐 행운이었다.

여행은... 인생의 은유이다!
『여행이 은유하는 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