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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생각 짧은 글/1. 유쾌한 백수생활

081007 막철을 타고 가며

by 무딘펜 bluntpen 2008. 10. 7.


술을 좋아한다. 주당들이 대개 그러하듯 귀가가 늦다. 가끔은 술값보다 택시비가 더 든다. 가능하면 지하철을 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지하철을 타더라도 대부분 막차를 타는 경우가 많다.

수원방면 지하철은 용산역에서 11시 30분 경에 있다. 어제도 술자리가 있었다. 한 잔 더 하고 싶은 유혹을 순애씨 떼놓고 돌아서는 수일이 마음처럼 긴 미련으로 남기고 병점행 마지막 지하철을 탔다.

자리가 없다. 아니, 자리는 많은데 빈자리가 없다. 아니, 빈자리는 있는데 경로석이다. 앉았다. 왜? 피곤하니까? 아니 변명이 필요없다. 그냥 앉았다.

아차! 앞의 말 정정이다. 경로석 외에도 딱 한개 빈자리가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맨 귀퉁이 자리. 그런데 거기에 떡하니 온갖 잡동사니가 든 마트 비닐봉투 두 개가 인간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옆에는 허름한 잠바 차림, 슬리퍼, 며칠째 안 감은 듯 보이는 듬성듬성 흰머리를 갖춘 중년 남자가 앉아 있다. 물건을 치워달랄까? 귀찮다. 그냥 경로석에 앉았다.

비닐봉투 아자씨 바로 옆에 떡대좋은 젊은 총각이 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 취했다. 나보다 더 취했다. 꾸벅꾸벅 존다. 그러다 그 비닐봉투 아저씨 쪽으로 몸을 기댄다. 아저씨가 질색을 한다. 힘껏 밀친다. 덩치가 있어서 잘 안 밀린다.

두드려 깨운다. 게슴츠레... 정신이 없다. 아저씨의 한바탕 설교가 시작된다. 길다. 그 젊은이 고생 많다. 술먹고 잠시 옆 사람에게 기댄 죄로 교장실 불려 들어간 초등학생처럼 다소곳이 훈시를 듣는 것을 보니 근래 보기 드물게 예의 바른 청년이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더욱 흥이 나서 얘기가 점점 더 길어진다. 신도림에서 내리기 직전까지 인생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다.

비닐봉투 아저씨의 말씀 요점정리;
"젊은 사람이 이렇게 과음을 하고 다니면 쓰나? 나도 술을 먹지만 담배는 안핀다. 술은 1명만 먹는다. 그리고 술은 먹어도 남에게 절대 피해를 안준다. 그것이 내가 인생을 사는 원칙이다. 젊은 때부터 인생은 원칙을 세워서 살아야 한다..."

그 아저씨 내리면서 어디까지 가냐고, 조심해서 가라고, 열심히 살라고 청년의 어깨를 두드려 주기까지 한다. 본보기가 될만한 훌륭한 어르신.

그런데 아저씨! 그 봉투에 뭐가 들었길래 사람앉을 자리에 앉히셨나요? 그리고 지하철에서 크게 떠들면 안돼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