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겆이를 하다가 문득 주방 창으로 내다본 뒷산에 분홍빛 안개가 어른거린다. 해마다 이맘 때에 아파트 뒷곁에 핀 진달래를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건 안양천을 앞에 두고 삼성산을 뒷곁에 둔 배산임수 아파트에서 즐길 수 있는 계절의 호사다.
진달래 핀 걸 보니 문득 문둥이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 참꽃(진달래) 핀 곳에는 혼자 가지 말라고 어른들이 타일렀 다. 그곳에 문둥이가 있어서 어린 아이들의 간을 빼먹는다고. 문둥병에는 어린아이 간이 특효약이라는 말과 함께. 그 때도 설마하는 마음에 믿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진달래 핀 곳을 지나치노라면 어른들한테 들은 그 말이 생각나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 보기는 했다.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란 애들이 문둥병 환자를 보면 외면하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어른들 역시 진실과 상관없이 문둥이들을 멀리했을 테고. 어릴 적에 동냥을 하러 온 거지나 상이군인, 시주받으러 온 스님은 많이 봤어도 문둥병 환자를 마주친 기억이 없음은 그 때문일까.
문둥병(한센병)은 천형이라고 불렀다.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는 뜻이다.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하늘에서 이런 지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인가. 살이 썩어 문드러져서 어느날 자기도 모르게 손발가락이 떨어져 나간다는 끔찍한 병, 그러나 그들이 참 기 어려운 건 육체적 시련이 아니라, 천형이라느니, 어린애 간을 빼먹는다느니 하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로 자신들을 멀리 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그들에게는 천형의 의미였으리라.
진달래와 김소월과 지난해 남파랑길을 걷다가 멀리서 바라본 소록도, 그리고 한하운 시인의 책에 나오는 다음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
“천형(天刑)의 문둥이가 되고 보니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오히려 아름답고 한이 많다. 아랑곳없이 다 잊은 듯 산천초목과 인간의 애환이 다시금 아름다워 스스로 나의 통곡이 흐느껴진다.”
보리피리//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리리. |
// 20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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