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아이의 시니컬한, 그러나 따스한 삶에 대한 시선"
[ 책 소개 ]
은희경에게 '문학동네 소설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1995년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73쇄를 찍었다는 건 이 소설의 인기를 짐작케 한다.
1995년 무궁화호가 발사되는 광경을 본 30대 후반의 주인공이 아폴로 11호가 달을 향해 발사되던 1969년 열두 살 소녀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이른바 '액자소설' 형식으로 성장소설이며, 세태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방 소읍에서 부모없이 외할머니 슬하에서 살며 '나는 삶이 내게 별반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열두 살에 성장을 멈췄다'고 선언하는 소녀가 바라보는 세상은 허위에 차 있고 우스꽝스럽게 비쳐진다. 하지만 세태에 대한 비웃음만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뒷꼭지를 슬며시 들여다보면 때때로 거부할 수 없는 따스함이 느껴진다.
[ 읽고나서 ]
<1>
어느 책에선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 책에 대한 호평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적어 두었는데, 며칠 전 같이 근무하는 직원의 책꽂이에서 발견하고는 얼른 빌려서 읽었다. 참고로 그 여직원은 이 책을 수십 번을 읽었다고 했다.
<2>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새의 선물'인지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만 책 앞에
'자크 프레베르'라는 시인의 <새의 선물> 이라는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는데 이 시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
<3>
책의 뒷표지에 의례 나오는 간단한 서평을 읽으면서 살짝 의아한 감이 들었다. 문학평론가 김화영씨는 "삶의 이면을 너무 일찍 보아버린 아이의 날카로운 비판적 시선과 거기서 오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가차없는 묘사"라고 표현했고, 소설가 윤홍길씨는 "시종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해학적인 문체와 치밀한 심리 묘사"라고 평가했다.
작품에 대한 감상이야 독자(평론가를 포함하여) 각자의 몫이지만, 두 분의 평은 온도 차이가 꽤나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난 후 나의 개인적인 느낌은 후자에 조금 가깝다.
물론 주인공의 어린애 답지않은 시선의 날카로움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남을 찔러 상처입히는 시퍼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삶에 대하여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p.12)
삶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그에 따른 실망을 감당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보다는 오히려 기대치를 낮게 갖고 그 범위 내에서 자기의 삶을 충실히 꾸려 나가는 삶이 차리리 긍정적이지 않을까? 나는 주인공도 그렇게 나의 견해에 동조하리라 본다.
<4>
이 작품은 전체가 하나의 소설이지만 22개의 에피소드 각각이 독립적인 완결형식을 갖추고 있다. 다 읽고 나면 마치 각각의 이야기꺼리를 풀어놓은 여러 개의 에피소드를 전체의 주제안에 포근하게 통합한 듯한 느낌을 준다.
그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것은 아마 은희경 작가의 뛰어난 역량 덕분이리라. 또한 각각의 에피소드에는 제목들이 붙여져 있는데, 그것이 매우 절묘하여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예를 들어 철없고 자기만족에 빠진 이모에 대한 '자기만 예쁘게 보이는 거울이 있으니', 잘난 척하는 장군이 엄마에 대한 복수로 주인공이 자기집에 세들어 사는 친구 장군이를 똥통에 빠뜨리는 사건을 그리는 '네 발밑의 냄새나는 허공', 무능력자이고 병역기피자이면서도 바깥에서는 큰 소리만 치고, 집에서는 마누라를 괴롭히는 광진테라 아줌마의 못난 남편 이야기인 '까탈스럽기로는 풍운아의 아내 자격'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이 책의 목차만 읽어도 '이게 무슨 얘기일까'하고 누구라도 궁금해 질 것이다.
<5>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나 여기에 그려진 생활상이 나의 어린 시절과 맞아 떨어지는 점도 내가 이 작품에 몰입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60년대가 끝나고 70년대가 막 시작되는 시기이니 내가 막 국민학교 입학하던 시절과 근접한다. 그리고 친숙한 시골읍내의 간판이름들, 그 당시 유행하던 펜팔 이야기, 상이군인 이야기, 지저분한 읍내의 버스 차부 이야기 등도 내 어릴 적 기억들과 일치한다.
나 역시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삶의 출발선에 서 보았으며, 살아 가기 위해서는 눈치를 키워야 하하지만 동시에 나의 눈치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요령이 또한 발휘되어야 하는 미묘한 상황에 종종 처해 보았기에 주인공의 다소 삐딱한 시선에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어 은근히 응원을 보내게 되었다.
사실 다음과 같은 주인공의 얘기는 표현의 세련됨만 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p.12)
주관적인 행위자로서의 나(=보여지는 나)를 거느릴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방관자(=바라보는 나)로서의 나 역시도 모시고 사는 게 삶이 아닐까? 즉 나의 모든 행동을 남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추어질까 하는 의식은 누구나 하고 산다는 것이다.
<6>
이 글을 읽으면서 가장 찡하게 와닿았던 장면은 두 가지이다. 우선 가출했다가 망나니 남편의 설득으로 광진테라 아줌마가 며칠 만에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었다.
아줌마가 무슨 비밀을 털어놓을 듯이 할머니 쪽으로 조금 몸을 기울였다.
“저, 진희 할머니니까 말씀인데..."
"..."
“그날 밤 둘째를 가졌어요.”
말을 꺼낼 때부터 주저하더니 막상 하려던 얘기를 하고 나서 아줌마는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미쳤지요. 재성이 아빠가 이제 마음잡고 재미나게 살아보자고 하는데 그 말을 들으니까 꼭..."
드디어 아줌마의 뺨 위로 눈물 한 줄이 흘러내렸다.
"꼭 처음 청혼받는 기분이었어요."
아줌마는 다시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눈을 몇 번 깜박여서 도로 집어넣고 고개를 조금 숙이더니 이미 뺨 위로 흘러내린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p.273)
둘째는 이모가 다른 남자의 애를 떼고 돌아오는 길에 그를 사모했으나 실연의 아픔을 안겨 주었던 청년(홍기웅)을 만나서 그가 모는 트럭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앞 유리의 와이퍼만을 보고 있지만 홍기웅은 거의 쓰러질 듯한 이모 대문에 마음이 쓰라린지 표정이 굳어 있다. 그 쓰라림이, 자기가 눈물을 훔칠 생각조차 못하고 검은 산처럼 사라져준 뒤 이모가 허석과 사람에 빠지고 그의 아이를 갖고 그리고 그 중절수술을 하느라 얻은 고통이란 것을 그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혹시 그것을 알았다면 이모를 다시 저 눈밭으로 내쫒아버릴까.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알았다 할지라도 이모의 고통이 그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꽤 희귀한 것을 갖고 있는데, 바로 순정이었다.(p.420)
[맘에 드는 구절]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약점이 생기고 어리석어진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반장 애는 결국 내 마음을 붙잡지 못하였다.(p.48)
* 이게 과연 '어려서' 만일까? 모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랑들의 고통이고, 밀당의 원리이며, 이것이 아니라면 세상에 있는 문학소설의 반 이상은 씌어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어쩌면 미운 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더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p.137)
나는 허석과의 예상치 않은 재회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까의 슬픔, 바로 거기에서 이별의 이미지가 완결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팥쥐 역을 맡아 지금껏 열심히 연습했는데 갑자기 콩쥐로 배역이 바뀐 것처럼 나는 맥이 빠진다. 그렇게나 몰두 했던 팥쥐의 감정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면서 콩쥐의 감정에마저 무덤덤해진다. 이별의 슬픔이 무의미해지자 사랑마저 시들해진다는 걸 나는 처음 깨닫는다.(p.227)
가려운 곳을 긁는다는 것은 짜릿한 맛이 있다. 바로 그 맛을 위해 할머니는 매일 가려운 곳을 일부러 찾는 것은 아닐까. 가렵다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가려운 곳이 없으면 어떻게 긁는 순간의 쾌감을 느낄 것인가. 할머니가 가려움증을 찾듯이 나도 일부러 그리움을 불러들이는 것인가.(p.250)
이모처럼 감상적인 사람은 삶을 너무 낙천적으로 생각한다. 아니 삶이 자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다. 자기의 행복과 불행의 조종간을 통째로 타인의 손에 쥐어준다면 그 타인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잠시일 뿐이다.
사람의 감정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며 특히 젊은이를 변심하게 만드는 일은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상대가 나를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상대의 사랑을 잃을 때 내가 불행해진다는 것과 같은 뜻임을 깨닫고 그 사랑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한편 그것이 사라질 때의 상실감에 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타인을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이 세상에 그런 사랑은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이모는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p.339)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