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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생각 짧은 글/3. 나의 살던 고향은

[추억] 사라져 가는 우리의 짚문화를 바라보며(펌)

by 무딘펜 bluntpen 2016. 12. 4.
추수가 끝나고 나면 논바닥마다 높게 쌓아놓았던 짚가리는 겨울 한철 가축들의 먹이나 다음 해 농사준비를 위한 재료로 쓰이곤 했다.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 생활용품들을 만드는 가장 훌륭한 재료였던 짚, 오마이 뉴스에서 잘 설명한 자료가 있어서 퍼왔다.


[사진] 사라져 가는 우리 짚 문화를 돌아보며

06.04.09 19:48l최종 업데이트 06.04.10 10:01l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은 새끼를 꼬아 멍석을 만들고, 가마니를 짜고, 삼태기나 짚신, 다래끼 같은 것을 만들어 사용했다. 특히 울타리를 엮어나 이엉을 엮을 땐 새끼가 많이 필요해 어린 우리들도 새끼를 꼬았던 기억이 난다.

어른들 솜씨는 못 따라가지만 그땐 제법 새끼를 잘 꼬았다는 소리도 들었다. 침을 퉤퉤 받으며 새끼를 꼬다 보면 손바닥이 새까맣게 변해 한참을 닦아도 닦이지 않았다. 그러나 길다랗게 꼬인 새끼줄을 보면 마음이 흐뭇해 '어때요. 잘 꼬았죠?' 하며 아버지한테 보여드리면 '그놈 괜찮게 꼬는구나'하며 허허 웃곤 하였다.

우리민족은 짚과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농경문화 속에서 우리 선조들은 짚을 가지고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손수 만들어 사용했다. 그랬던 짚이 문화라는 이름을 얻어 박제된 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새끼를 가끔 우리 민족성과 연관시켜 생각할 때가 있다. 하나하나의 지푸라기는 가늘고 연약하지만 여러 개가 모여 꼬여지면 쉽게 끊어지지 않는 힘이 있는 끈이 된다. 그 끈을 다시 여러 겹으로 다시 엮으면 동아줄이 되어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이는 우리 민족 하나하나는 강하지 않지만 여러 사람이 모이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큰 에너지를 분출함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의 힘, 어쩌면 그 힘도 낱낱의 지푸라기가 모여 새끼를 이루고, 새끼줄이 모여 동아줄이 되듯이 우리 국민 하나하나가 새끼줄이 되어 동아줄을 만든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옛날 우리 선조들은 짚을 통해 어떤 생활도구를 만들어 생활했을까? 그 생활도구들을 바라보면서 향수에 젖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 지게
ⓒ 김현
지게이다. 지금처럼 기계가 발달하지 못한 때에 지게는 농사일에 꼭 필요한 도구였다. 흙을 나를 때에도, 소꼴을 베어 한 짐 나를 때에도, 거름을 내거나 볏가리를 나를 때에도 지게는 필요했다. 다만 사람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힘이 약한 사람은 쉽게 지지 못했다. 어릴 때 지게를 지고 가다 짐이 버거워 넘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야야, 힘으로만 하지 말고 요령이 있어야 한 거여' 하고 이야기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농사를 짓던 농가엔 한두 개의 지게가 마당 귀퉁이에 놓여 있었는데 요즘은 지게 대신 경운기나 트랙타가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발채
ⓒ 김현
발채(바작)이다. 짐을 실기 위해 지게에 얹는 소쿠리 모양의 물건으로 싸리나무로 주로 만들었다. 발채의 모양은 둥글넓적하게 조개모양으로 결어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아주 어릴 때 아버지는 지게 위에 얹은 발채에 나를 태우고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면 지게와 발채는 다정한 부부 같은 관계이다. 늘 함께 있다. 가끔 떨어져 있다가도 금세 그리운지 다시 만난다. 그렇게 함께 만났다가 패이고 닳아져서 아무런 말도 없이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신들이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삶을 마감한다. 인생살이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음을 본다.


▲ 물레방아
ⓒ 김현
지붕개량이 이루어지 않은 시기엔 농촌의 대부분은 초가집이었다. 가을철 농사일이 끝나면 가장 큰일이 울타리를 새로 하거나 지붕에 이엉을 얹는 일이다. 울타리를 하고 이엉을 얹는 일은 대부분 남자들의 일이기 때문에 여자들은 새참이나 준비하면 되었다. 물론 남자아이들은 어른들이 일을 할 때 짚단을 가져다주거나 잡아주는 일을 해야 했다. 그렇게 이엉을 하면 한 해의 일이 마무리되었다.

물레방앗간 지붕에 이엉을 얹는 것도 같은 시기였다. 옛날 물레방아는 사연이 많은 곳이기도 하고,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도 나왔듯이 달밤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물레방아는 서민들과 가까이서 애환을 함께 했다. 그래서 그런지 달밤의 물레방아를 보면 애틋하고 야릇한 생각이 든다. 또 물레방아가 도는 모습을 보면 정겨움이 절로 일어난다.

▲ 똬리
ⓒ 김현
똬리는 지방에 따라 또아리, 또바리, 또가리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똬리는 짚이나 헝겊을 둥글게 틀어서 만든 것으로 이것은 여인네와 애환을 함께 한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여인네들이 머리 위에 물동이를 얹을 때나,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일 때 똬리를 이용했다. 똬리가 없을 땐 급한 데로 수건을 똬리처럼 틀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남자들이 지게를 이용해 물건을 날랐다면 여자들은 똬리을 이용해 머리에 물건을 날랐다.

똬리만 올려놓으면 여인네들의 머리는 천하무적이었다. 물항아리건, 짐보따리건, 볏짚이건, 똬리 위에 물건을 올려놓으면 모두가 얌전해졌다. 어린 나이에도 내 어머니의 머리나, 동네 아줌마들의 머리는 신기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물건들을 얌전하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생각하면 여자들의 아픔 아닌 아픔을 돌이켜 보게 된다.

▲ 다래끼
ⓒ 김현
다래끼는 주둥이가 좁고 바닥이 넒은 바구니로 대나무, 싸리나무, 칡덩굴 등으로 만들어 고사리 같은 나물이나 콩, 팥 같은 곡물을 담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대나무나 싸리나무 같은 걸로 만들었기 때문에 통풍이 잘 되어 고사리 같은 나물을 담아두면 누렇게 뜨지 않고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 짚으로도 다래끼 모양의 물건을 만들어 농가에선 사용하곤 했다. 그러나 요즘엔 이런 물건 찾아보기 무척 힘들다. 생활의 편리 속에 옛것들은 소리 없이 새로운 것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 새덫을 만들고 있는 모습
ⓒ 김현
새덫을 만드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능숙하게 움직인다. 언제부터 만들었냐고 하니까 아주 어릴 때부터 배워 만들었고 하신다. 새덫은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새덫은 마당가에 세워두고 그 안에 모이를 두면 새가 새덫 안에 들어가 낟알이나 콩 같은 것을 주워 먹다 덫을 괸 막대기를 건들면 덫이 넘어지게 만들어 새를 잡는 도구이다. 새가 언제 들어가서 덫이 언제 내려질까 눈을 쫑긋 뜨고 바라봤던 기억이 새롭다.

▲ 새덫
ⓒ 김현
새덫이 없을 땐 삼태기를 이용해 새덫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삼태기를 가지고 덫을 만들면 새들도 영리하여 그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원치 않은 쥐새끼가 들어가 갇혀 찍찍거리곤 했다. 그러면 무서워 옆에 가지도 못하고 쥐가 달아나지 않도록 무거운 돌을 삼태기 위에 올려놓고 어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곤 했었다.

▲ 새끼로 만든 장화
ⓒ 김현
새끼를 꼬아 엮어 만든 장화이다. 새끼줄로 만든 장화는 언제 신었을까? 장화란 비가 왔을 때 신은 것인데 짚으로 만든 장화를 여름철 비가 올 때 신지 않았으면 겨울에 눈이 왔을 때 신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짚신을 신고 눈길을 걸으면 눈에 푹푹 빠지고 나중엔 발이 꽁꽁 얼었을 터. 저 짚 장화를 신고 눈길을 가면 미끄럽지도 않고 발도 따뜻해지지 않을까. 장화를 보면서 선조들의 지혜와 재주에 절로 감탄이 인다. 한 번 신어보고 싶은 충동이 슬며시 일어난다.

▲ 짚신
ⓒ 김현
짚신은 우리 서민들이 가장 애용했던 신발이다. 나막신을 신을 수 없었던 서민들은 고무신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짚신을 신고 일터도 가고, 장도 가고 했다. 가난한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도 괴나리봇짐 꽁지엔 짚신 두어 켤레가 달랑거리며 따라갔던 모습은 텔레비전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서민들의 발을 책임졌던 신발이었던 짚신 중 주로 만들어 사용했던 것은 네날짚신이다. 네날짚신은 네줄의 새끼로 날을 삼고 짚으로 씨를 감으며 삼았다. 어릴 때 아버지나 동네 어르신들이 짚신을 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뒷마무리를 잘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아 헐거워지거나 뒤꿈치가 불편에 신기가 어렵단다'하며 마무리 공정에 심혈을 기울이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데 짚신은 사람만 신은 건 아니었다. 농가에선 농사철 소에게도 짚신을 신겼다. 소의 발을 보호하기도 하고, 질퍽거리는 논흙에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짚신은 짚을 이용해 만든 물건 중 가장 정교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짚신도 좀 더 세련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짚만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이용해 만들기도 했다. 주로 짚으론 만든 신발은 네줄짚신을 만들었지만, 점차 왕골이나 삼을 이용해 육날 미투리를 삼기도 했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것은 짚으로 만든 짚신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짚을 이용해 만든 것들이 많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멍석이다. 새끼를 꼬아 만든 것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야 만들 수 있는 것이 멍석이다. 그런 만큼 그 쓰임도 다양해다. 곡식을 말리는 도구로도 사용되고, 타작용도 되고, 아이들 놀이터도 되고, 저녁밥상의 평상도 되고, 잠자리도 되고, 윷놀이판의 도구도 되었다.

이렇게 짚은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함께 해왔다. 그러나 짚으로 만든 것들은 수명이 짧았다. 어떤 것은 일주일이면 다했고, 어떤 것은 서너 달, 길어야 몇 년이었다. 그래도 농민들은 계속해서 짚을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발전시켰다. 그러면서 농민들과 한 숨결로 살아왔다. 그러던 짚 문화가 기계화되면서부터 소리도 없이 세월의 뒤안길로 숨어버렸다. 지금은 땔감으로도 이용되지 못하고 소의 여물 정도로만 겨우 사용되고 있다.

일부에선 우리의 짚문화와 풀문화를 살려 농촌을 살리고 문화관광 상품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아직 짚과 풀을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살아있을 때 실시해야 한다. 그러기위해선 여러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한데 아직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산하에 지천으로 있는 풀과 짚.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곁에서 살아 움직였던 것들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라도 우리 서민들의 숨결이 묻어 있고 함께 했던 짚으로 만든 것들이 다시 우리 생활에 쓰이는 존재가 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도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