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에서는 아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이, '몽고반점'에서는 처제의 엉덩이에 남은 몽고반점을 탐하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사진작가인 영혜의 형부가, '나무 불꽃'에서는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을 목격했으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혜가 각각 화자로 등장하는 세 개의 중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채식주의자』의 1부 「채식주의자」는 영혜 남편인 ‘나’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어린시절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죽이는 장면이 뇌리에 박힌 영혜는 어느날 꿈에 나타난 끔찍한 영상에 사로잡혀 육식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영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처가 사람들을 동원해 영혜를 말리고자 한다. 영혜의 언니 인혜의 집들이에서 영혜는 또 육식을 거부하고, 이에 못마땅한 장인이 강제로 영혜의 입에 고기를 넣으려 하자, 영혜는 그 자리에서 손목을 긋는다.
2부 「몽고반점」은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인 비디오아티스트 ‘나’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 사는 동생을 측은해하는 아내 인혜에게서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영혜의 몸을 욕망하게 된다. ‘나’는 영혜를 찾아가 비디오작품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청한다. 벌거벗은 영혜의 몸에 바디페인팅을 해서 비디오로 찍지만, 성에 차지 않은 ‘나’는 후배에게 남자 모델을 제안한다. 남녀의 교합 장면을 원했지만 거절하는 후배 대신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 영혜와 교합하여 비디오로 찍는다. 다음날 벌거벗은 두 사람의 모습을 아내가 발견한다.
3부 「나무 불꽃」은, 처제와의 부정 이후에 종적없이 사라진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가족들 모두 등돌린 영혜의 병수발을 들어야 하는 인혜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영혜가 입원한 정신병원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인혜는 식음을 전폐하고, 링거조차 받아들이지 않아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는 영혜를 만나고, 영혜는 자신이 이제 곧 나무가 될 거라고 말한다. 강제로 음식을 주입하려는 의료진의 시도를 보다못한 인혜는 영혜를 큰병원으로 데리고 가기로 결심한다.
- YES24 [출판사 리뷰]에서
III. 느낀 점
이 연작소설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당연히 영혜라는 여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개성이나 자기표현없이 모든 것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온 주부 5년차. 남편조
차도 그녀와 결혼한 이유를,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난한 결혼생활 5년...
그러나 어느날 도마 위에 고기를 썰던 그녀는 남편의 채근에 허둥대며 칼질을 하다가 삐끗하여 칼날이 부러지고 그것이 불고기 속에 묻혀 남편이 이를 삼킬 뻔한다. 그리고 이어진 남편의 강한 질책...
그 순간 그녀는 (예전처럼) 당황하기는 커녕 스스로도 놀랄만큼 침착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그날밤 이상한 꿈을 꾸게 되고 이후 고기를 먹기를 거부하는 채식주의자가 된다. (이런 사건의 구체적인 발단에 대하여 주인공이 밝힌 적은 없다. 그러므로 제1부의 내용 중에 주인공의 생각들 중 중요한 부분을 아래에 정리해 놓았는데 이것을 살펴보면서 짐작해 보기 바란다.)
고기 먹기를 강요하는 식구들 앞에서 자해를 하고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까지가 1부(채식주의자)이고, 퇴원 이후 주인공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에 집착하는 형부와의 성적인 관계로 언니부부의 이혼을 비롯한 여러사람들의 파탄이 촉발되는 것 까지가 2부(몽고반점)이며, 산골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본인이 스스로 나무가 되어 간다는 생각하며 그에 따라 행동하는 3부(나무불꽃)로 이어진다.
이 연작소설의 구성상 특이한 점은 1부는 주인공의 남편, 2부는 주인공의 형부, 3부는 주인공의 언니의 시점으로 씌어진다는 점이며, 주인공의 내면 뿐만 아니라 각각 화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상처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들이 병렬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고 맨부커상 수상작이라는 화제를 염두에 두고 읽은 책이라서 기대를 많이 하긴 했는데, 실제로 읽고 나니 '나쁘지 않다' 정도가 나의 개인적인 평이다. 구성의 치밀함과 여성작가답게 세세한 심리적 묘사는 일품이다. 다만 일부 표현들은 감수성 두꺼운 내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노력이 필요했다 정도..
휴일에 같이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와 비슷한 수준, 또는 원서와 (일본어) 번역서의 차이에 해당하는 정도의 살짝 나은 정도의 점수랄까?
사족으로... 뒤편에 딸린 '해설' 부분은 독서에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각자가 판단하시기 바란다.
IV. 목차와 기억할 문구
1. 채식주의자 : 주인공의 생각이 중간중간 이탤릭체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그녀의 심리를 짐작할 수 있는 표현들만 뽑아본다.
p.26
알지, 당신이 서두를 때면 나는 정신을 못 차리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허둥대고, 그래서 오히려 일들이 뒤엉키지. 빨리, 더 빨리. 칼을 쥔 손이 바빠서 목덜미가 뜨거워졌어. 갑자기 도마가 앞으로 밀렸어. 손가락을 벤 것, 식칼의 이가 나간 건 그 찰나야.
p.27
뭐야, 이건! 칼조각 아냐!
일그러진 얼굴로 날뛰는 당신을 나는 우두커니 바라보았어.
그냥 삼켰으면 어쩔 뻔했어! 죽을 뻔했잖아!
왜 나는 그때 놀라지 않았을까. 오히려 더욱 침착해졌어. 마치 서늘한 손이 내 이마를 짚어준 것 같았어. 문득 썰물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미끄러지듯 밀려나갔어. 식탁이, 당신이, 부엌의 모든 가구들이. 나와 내가 앉은 의자만 무한한 공간 속에 남은 것 같았어.
다음날 새벽이었어. 헛간 속의 피웅덩이, 거기 비친 얼굴을 처음 본 건.
p.37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내가 뭔가의 뒤편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손잡이가 없는 문 뒤에 갇힌 것 같아. 아니, 어저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걸 이제야 갑자기 알게 된 걸까. 어두워. 모든 것이 캄캄하게 뭉개어져 있어
p.42
셀 수 없이 깨어나 맨발로 서성거리는 밤에 집은 식어 있어. 식은 밥, 식은 국처럼 싸늘해. 검은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두운 현관문이 간혹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지만, 문을 두드린 사람 따위는 없어. 돌아와 이불 틈에 손을 넣어보면, 다 식어 있어.
p.43
내가 믿는 건 내 가슴 뿐이야. 난 내 젓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줄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찮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p.53
다섯 바퀴 째 돌자 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 줄에 걸린 목에서 피가 흘러. 목이 아파 낑낑대며, 개는 질질 끌리며 달려. 여섯 바퀴째, 개은 입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 목에서도 입에서도 피가 흘러. 거품 섞인 피, 번쩍이는 두 눈을 나는 꼿꼿이 서서 지켜봐. 일곱 바퀴째 나타날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축 늘어진 녀석을 오토바이 뒤에 실은 아버지가 보여. 녀석의 덜러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나는 보고 있어.
p.60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레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2. 몽고반점
아내가 "글쎄..... 나도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영혜는 뭐, 스무살까지도 남아 있었는 걸" 하고 뜻없이 말하지 않았다면, "스무살?" 하는 그의 물음에 "응..... 그냥, 엄지손가락만하게, 파랗게, 그때까지 있었으니 아마 지금도 있을 거야"라는 아내의 대답이 뒤따르지 않았다면. 여인의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꽃이 열리는 장면은 바로 그 순간 그를 충격했다.- p.73
처제의 외꺼풀, 눈, 아내 같은 비음이 섞이지 않은, 다소 투박하나 정직한 목소리, 수수한 옷차림과 중성적으로 튀어나온 광대뼈까지 모두 그의 마음에 들었다. 아내와 비교한다면 훨씬 못생겼다고 할 수 있는 처제의 모습에서, 가지를 치지 않는 야생의 나무 같은 힘이 느껴졌다. - p.78
십여년 동안 자신이 해온 모든 작업이 조용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알았던, 혹은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었다. - p.84
아이를 통해 연결된, 군더더기없는, 일종의 동업자 관계가 이즈음 아내와 그의 관계였다. - p.99
그는 숨을 죽인 채 그녀의 엉덩이를 바라보았다. 토실토실한 두개의 둔덕 위로 흔히 천사의 미소라고 불리는, 옴폭하게 찍힌 두 개의 보조개가 있었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멋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 p.101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 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 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 p.104
이토록 쉽게 체념하고, 그 체념의 앙금이 우울함으로 가라앉는 아내의 성격이 그를 숨막히게 했다. 그것이 아내의 선하고 약한 면임을,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임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이 자기중심적이고 무책임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아내의 인내와 선의가 숨막힌다고, 그래서 더더욱 자신이 나쁜 쪽으로 되어가는 거라고 강변하고 싶었다. - p.120
이 즈음처럼 무수한 색채들이 - 물론 이전에도 색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었으나 - 그의 안에서 터져나온 적은 없었다. 마치 몸의 내부가 힘찬 색채들로 가득 차올라, 그 격렬함이 더 견디지 못해 분출돼 나오는 것 같았다. 매우 격렬하게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이전의 어떤 시기에도 결코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각이었다. - p.122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긴장돼 있었으나, 거꾸로 그에게 변명하듯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 말씨를 알고 있었다. 아내가 극도로 감정을 숨기려 할 때의 느리고 낮은, 미세히 떨리는 음성이었다. - p.144
"나쁜 새끼."
아내는 낮은 소리로, 눈물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아직 정신도 성치 않은 애를.... 저런 애를."
아내의 젖은 입술이 파들거렸다. - p.146
3. 나무 불꽃
손이 거칠던 아버지에게 차례로 뺨을 맞던 어린시절부터 영혜는 그녀에게 무한히 보살펴야 할, 흡사 모성애와 같은 책임감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p.158
고맙게도 그렇게 살가운 제안을 해주었지만, 그때 영혜의 입가에 어린 조용한 미소는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마치, 그녀가 영혜를 낯설게 느끼는 것만큼이나 영혜 역시 그녀를 낯설게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침착하다는 인상을 넘어 거의 적막하게 느껴지는 그 얼굴 앞에서 그녀는 대답을 읽었다. 그것은 남편의 우울한 태도와는 전혀 닯은 데가 없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동일하게 그녀를 좌절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 다 비슷하게 말수가 적어서였을까. - p.159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남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p.161
그는 고지식해 보일 만큼 올곧은 성격의 사람이었고, 누구에게든 과장이나 아첨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늘 친절했고, 한번도 거친 말을 쓰지 않았으며, 이따금 존경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에게 과분해.
결혼전에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 그런 게 감동을 줘.
그 말은 다소 어려웠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오히려 그가 사랑 따위에 빠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고백은 아니었을까. - p.162
그의 열정어린 작품들과,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 같은 그의 일상 사이에는 결코 동일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간격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p.162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p.169
이제는 저쯤의 미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병원에 자주 드나들게 된 뒤, 그녀에게는 가끔 정상적인 인간들로 가득 찬 평온한 거리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p.172
그 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 p.173
동생의 어깨를 흔들고, 억지로 입을 벌리고 싶은 충동을 그녀는 억누른다. 고막이 찢어지게 영혜의 귀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 싶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죽고 싶니. 정말 죽고 싶어? 자신의 안에서 뜨거운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녀는 망연히 들여다본다. - p.188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졐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로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 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없이, 저녁 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를 보고 있었을 뿐이다. - p. 192
그러나 그것이 정말 그를 위한 것이었을까. 함께 살았던 판년 동안, 그가 그녀를 좌절시킨 만큼 그녀 역시 그를 좌절시켰던 것은 아닐까? - p.193
만일 나쁜 병이라면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일년, 육개월, 아니면 삼개월. 그때 그녀가 처음으로 생생하게 의식한 것은 그와 함께 살아온 긴 시간이었다.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시간. 최선을 다한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 바로 그녀 자신이 선택한 시간이었다. - p.196
문득 그녀는 이 순간을 수엇이 겪은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고통에 찬 확신이 마치 오래 준비된 것처럼,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 p.200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 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자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 p.201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잠을 이루지 못한 지난 석달 동안 그녀는 이따금 혼란 속에서 생각해왔다. 지우가 아니라면 - 그 애가 지워준 책임이 아니라면 - 자신 역시 그 끈을 놓쳐버릴 지도 모른다고. -p .204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잇을 가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p.204
그녀는 덩굴처럼 알몸으로 얽혀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분명히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성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꽃과 잎사귀, 푸른 줄기들로 뒤덮인 그들의 몸은 마치 어이상 사람이 아닌 듯 낯설었다.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게 멋어나오려는 몸부림으로 보였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테이프를 만들고 싶어했을까. 그 기묘하고 활양한 영상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전부를 잃었을까. - p.218.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