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농사일에 바쁜 사람들이 인편을 이용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였고, 대부분 편지나 전보를 이용하곤 했다. 편지는 도회지에 나가있는 아들딸들이 '부모님 전상서'로 시작하는 구구절절한 말로 시작하는 안부편지나 '국군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위문편지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가끔씩 돈 잘버는 친척이 선물을 소포로 보내주시면 입이 찢어지곤 했지.
또한 급한 경우에는 전보라는 것을 이용했는데 이 전보라는 것이 글자수에 따라 요금이 매겨졌기 때문에 아주 간단히 용건만 전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서울에 있는 아들에게 할아버님께서 편찮으시니 빨리 내려와라'하는 내용을 보낼 경우에는 '조부위독급래요'라고 썼던 것이다. 물론 이런 한자어를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우체국에 가면 샘플이 놓여있기도 했지만.
하여튼 이런 편지나 전보를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우체부 또는 집배원이라고 불렀는데, 우리 동네에도 이틀이나 사흘에 한번씩 갈색 가죽가방을 맨 우체부가 밤잿고개를 넘어 온 마을을 걸어서 돌며 우편물을 나눠주곤 했다. 물론 나중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신 것으로 기억되긴 한다.(요즘은 빨간우체통을 싣고 오토바이로 주로 배달을 하드라만...)
그런데 마을마다 고정적으로 한분이 배정되어 있었는지 내가 아는 한 권가 성을 가진 한분이 우리 동네를 오랜 세월동안 담당하셨는데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 분의 정확한 성함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른이건 아이들이건 그분을 권체부라고 불렀다. 맘씨 좋게 생긴 미소에 외부세계의 소식에 대한 목마름을 전해 주셨기에 무척 인기가 높으셨다.
권체부가 오는 날이면 고갯마루를 쳐다보며 혹시 우리집에 무슨 우편물을 전해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하곤 하던 기억이 난다. 용진과 동대리는 그리 큰 마을을 아니지만 초색부터 골안까지 돌려면 하루종일이 걸릴 거리라서 무척 힘드셨을 것으로 생각이 드는데 재미있는 일은 그분은 특별히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신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어느 집이나 점심때 우편물을 받으면 훈훈한 시골인심에 꼭 식사를 대접하였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그분도 정년을 채우시고 집에서 쉬고 계셨는데, 내가 바로 옆집에서 자취를 했었다. 워낙 걸어다니며 운동을 많이 하신 분이라 새하얀 머리색깔에도 불구하고 항상 건강해 보이셨는데 지금은 살아 계신지 정말 궁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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