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설명했던 놀이는 대부분 겨울철에 많이 했는데 이제부터는 사계절 내내 하던 놀이들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자.
먼저 구슬치기가 있었지. 일본말로 다마치기(다마라 하면 당구가 연상되기도 한다. 내가 당구 300이잖니?)라고도 했었지. 동그랗고 투명한 유리구슬 속에 여러가지 색색깔의 기기묘묘한 무늬가 들어있던 멋진 구슬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설렌다.
그런데 역시 구슬치기의 왕은 쇠구슬이었지. 눈에 띌까 말까 작은 종류부터 자동차 베어링에서 빼낸 커다란 종류까지 있었는데 구슬치기를 하다보면 이 녀석에 당해서 곳곳에 상처투성이가 되거나 아예 으깨진 유리구슬들도 많이 생기곤 했어. 그래서 유리구슬 10개당 같은 크기의 쇠구슬 하나를 거래하기도 했었지.
구슬치기의 종류는 먼저 단순하게 상대방의 구슬을 맞추면 따먹게 되는 놀이와 반뼘정도 되는 지름크기의 구멍을 파놓고 그 안에 집어 넣으면 이기는 종류의 단순한 놀이부터 시작한다.
그외에 동그라미 속에 구슬 여러개를 두고 쳐낸 것을 따먹는 것이나 십자형의 구멍을 5개 파먹고 구멍사이를 왕복하면 승리하는 범치기라는 종류까지 조금 복잡한 게임들도 있었지.
겨울철 추위로 곱은 손을 호호불면서 구슬치기를 하다보면 금방 한나절이 지나가곤 했는데, 너무 추우면 따뜻한 처마 밑에 모여들어서는 홀짝으로 단숨에 승부를 결정짓거나 쌈치기를 하기도 하는 통큰 녀석들도 있었지.
구슬치기만큼이나 인기 있었던 것이 딱지치기놀이였지. 처음에는 종이로 접은 딱지를 가지고 놀았는데 그 이후에는 가게에서 파는 빳빳한 종이에 마징가 제트나 마린보이 같은 만화영화 캐릭터들이 알록달록 그려져 있는 동그란 딱지의 가장자리에 둘러서는 별들이 그려져 있는 것을 가지고 놀았다.. 10원에 A4크기 두장정도의 분량 딱지를 팔았는데 그것을 뜯어내면 30-40장 정도의 딱지를 가질 수 있었지.
딱지놀이는 먼저 상대방 딱지를 내리쳐서 뒤집으면 따먹는 놀이, 딱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멀리 날려 보내는 놀이 등 기술을 겨루는 것에서 누구 별이 많은지 겨루거나 상대방이 손바닥에 숨긴 딱지가 홀이냐 짝이냐를 맞추어서 승부를 결정짓는 놀이를 하기도 했지.
딱지치기와 비슷한 것으로 한 때 유행했던 것이 병뚜껑 따먹기였는데 소주병, 사이다병 할 것 없이 금속성으로 된 뚜껑을 모아서 망치나 돌로 반듯하게 주름을 펴면 딱지크기만큼 되는데 이것을 딱지처럼 사용하곤 했지.
내 어린시절에 아버님께서 약주를 즐기셨는데 평상시에는 그 일을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나(하긴 나도 지금 술은 만만치 않게 마시는 편이지, 핏줄은 못 속인다는 말을 무시하기 힘들구만.), 아버님께서 소주를 즐기시는 것을 고맙게 여긴 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 병뚜껑을 많이 모을 수 있게 해주신다는 점이었으니 이 아들의 어린 마음을 그 때 아버님도 알고 계셨을까?
구슬치기는 돈이 들거나 약간 노름적인 성격도 있었는데 비해서 비석치기는 정말 손바닥만한 돌 하나만 있으면 즐길 수 있는 놀이였지. 또한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는 남자애들만 했었는데 비석치기는 여자애들과 어울려서 하기도 했었지.
비석치기에 사용하는 돌은 개울가에서 주워온 직사각형에 가까운 단단한 돌을 주로 사용했는데 돌끼리 자주 부딪치기에 잘 깨지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지.
비석치기는 출발선을 그어 놓은 후에 그로부터 너댓 걸음 떨어져 세워진 비석을 맞추어 넘어뜨리는 놀이인데 그냥 단순히 멀리서 맞추는 것에서 시작하는 발등, 무릅, 배, 가슴, 이마, 머리 위에다 올려놓고 몇걸음 이동하여 맞춰야 할 뿐만 아니라 엉덩이에 올려 놓고 뒷걸음을 치거나 돌을 던져놓고 눈을 감고 돌을 찾은 후 눈을 감은 상태에서 비석을 맞추어야 하는 고난도의 기술까지를 요구하는 놀이였어.
맨 마지막 단계가 눈감고 하는 맞추는 단계인데, 그 때 실눈을 떴니 안떴니 하면서 실랑이가 무척 많았지.
가이생(일본말같기는 한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이라고 하는 놀이도 참 많이 했었지. 가이생의 종류는 참 많았던 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오징어 가이생이라고 기억되는 한가지 밖에 없다.
오징어처럼 생긴 금을 그어놓고 공격팀은 오징어 몸통중간의 잘록한 부분을 세번을 건너 왕복한 후에 오징어 입쪽을 통해서 몸통 안쪽을 통과하여 꼬리부분에 있는 목표물에 당도하면 이기는 게임인데, 수비팀의 방해가 만만치 않기에 서로 몸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지곤 했었지.
나는 몸집도 작은 데다 제법 동작도 빠른 편이라 이 놀이에서 이기는 적이 많았기에 편먹을 때 내 편이 되려는 애들이 많았단다. 다만 가이생은 서로 잡고 늘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몸을 많이 찢어 먹었기에 집에 들어가면 어머님께 혼도 많이 났지.
요즘 농담삼아 '누가 죽었대', '왜?' '금 밟아서'라는 말들을 하는데 사실 그 '금'이라는 것이 바로 가이생에서의 선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요즘 애들은 알까?
비석치기, 가이생에 이어서 남녀가 같이 즐기던 놀이 중에 땅뺏기가 있었지.사방 2-3미터 정도 되는 사각형 금을 그어 자기 집으로 삼고 엄지손가락 크기의 납작한 돌을 사용했는데, 이 돌을 곱돌이라 하여 땅에 그으면 하얗게 그은 선이 선명한 돌이 인기였었지.
먼저 귀퉁이에 자기 손 한뼘 크기의 동그라미를 긋고 그곳에서 출발하여 손톱으로 곱돌을 튕기고, 세번만에 자기 집으로 돌아오면 그 안에 해당되는 것이 자기 영토가 되는 것이지. 재미있는 것은 한번 그렇게 성공하고 나면 보너스로 자기뼘으로 재어 다다르는 귀퉁이 땅을 자기 영토로 만들 수 있었지. 땅뺏기 놀이의 끝은 결국 공동지역을 모두 나눠먹기 한 후에 상대방의 땅을 침입하여 완전히 평정하고 나면 승부가 나는 것이었어.
땅뺏기는 두명이 하는 경우도 있었고 편을 먹어서 몇 명이 같이 할 수도 있는 놀이였는데 앉아서 하는 놀이라 여자 애들이 많이 했었고 또 섬세함을 요구하는 놀이라 여자 애들이 잘하기도 했지.
이런 조용한 놀이말구 가끔 여자애들도 끼워 주기는 했지만 주로 남자애들이 하는 놀이에 전쟁놀이를 빼놓을 수 없겠지. 이것을 정말 여러 사람이 해야 재미가 있는데 편을 가르면 편 내에서 각각 왕이나 장군 등으로 직책을 정하고 산중턱에 나뭇가지를 얼키설키해서 본부를 만들어 놓고 싸우곤 했는데 상대편을 다 죽이거나 왕을 붙잡으면 게임이 끝났지.
전쟁놀이는 칼싸움과 총싸움이 있었는데 TV에서 박근형씨가 주연한 '에루야'라는 프로가 유행할 때는 칼싸움이 먼저 인기를 얻었었어. 이것은 길다란 막대기를 칼로 삼아 상대와 겨루는 것인데 칼이 몸에 먼저 닿는 사람이 죽는 것으로 간주되었지.
칼싸움을 하던 시기에는 역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서 활도 무기로 많이 사용하였는데, 활은 주로 잘 휘는 물푸레 나무를 불에 살짝 구어서 휘게 한 후에 거기에 닥나무 껍질로 만든 줄을 매고, 화살은 수수대를 주로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그 끝에다 조그만 못을 하나 박으면 훨씬 많이 날아갔었지.
활로 상대를 맞추는 놀이도 하기도 하였지만 사실 장식용이나 고정표적에 대한 활쏘기 시합용으로 많이 썼고, 주 전쟁무기는 나무를 깎아만든 칼이나 창이었지.
전쟁놀이의 발전양상을 살펴보면, 그 당시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를 얻었던 전우라는 프로가 뜨면서 총싸움이 득세를 하게 되었지. 이것은 먼저 보는 사람이 상대를 겨누고 입으로 땅땅 총소리를 내면 상대편을 죽는 것으로 간주가 되기도 하였고 어떤 경우는 솔방울 등으로 총알을 대신하기도 하였었지.
또한 총싸움은 가끔 화약을 이용하여 폭음을 내면서 하기도 했지만 딱총을 이용하기도 했었지. 딱총은 (모나미)볼펜 껍데기를 이용하거나 속이 많이 비어있는 다래 덩굴을 이용하여 만들기도 하였는데, 종이를 질근질근 씹어서 동그랗게 총알을 만들고 그 뒤에 다시 같은 모양의 종이탄을 끼운 후에 작대기를 이용하여 뒤에 있는 탄을 밀면 압축된 공기에 의해서 앞의 총알이 발사되는 것이었지. 정통으로 맞으면 제법 아팠단다.
또 한가지 전쟁놀이의 양상은 물총을 이용한 것인데, 가게에서 산 싸구려 물총보다 망가진 우산대를 잘라서 앞쪽에 작은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물을 채운 후에 솜을 끼운 손잡이로 물을 밀어내는 방식인데 무척 멀리 나갔었지. 그런데 그것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게 뭔지 아니? 다림질 할 때 쓰는 물뿌리게 있잖니? 그것을 앞쪽을 약간 헐겁게 하면 어떤 물총보다도 멀리 나가고 물도 많이 담을 수 있어서 좋단다. 한번 해 보렴.
위에서 얘기한 국민드라마 '전우'에 대해서는 기억이 참 많다. 주인공으로 나왔던 나시찬씨(나중에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지)는 우리들의 영웅이 되었고, 전투에 나가 손짓을 이용하여 지휘하던 모습은 정말 멋져 보여서 전쟁놀이시에는 꼭 그것을 따라하곤 했었는데... 그리고 당시에 인민군 장교로 항상 나오던 배우는 이일웅씨였는데 기억하니? 그리고 전우 주제가는 '별넷'이라는 남성그룹이 불렀는데 나중에 한사람이 탈퇴하고 '별셋'이 되었어. 아직도 그 노래 기억난다.
더구나 '전우'에서 영춘넘어가는 고갯길에 안장되어 있는 팔용사(요즘은 거기에 묻힌 분들의 숫자도 늘고 비각까지 세워 놨더라만)에 대한 얘기를 다룬 적도 있어서 매우 감명깊게 보곤 했었다.
농한기인 겨울철과 달리 여름철에는 사실 농사일에 바빴던 어른들을 도울 일들이 많았기에 그리 놀 시간이 많지 못했고 그래서 생각나는 것도 많지 않다.
하여튼 여름철에는 역시 물놀이가 최고지. 냇물과 강이 가까워 우리는 일찍부터 수영을 배우긴 했지만 장마때는 물놀이를 하기가 무서웠어. 장마가 한번 지나가고 나서 개울물이 적당히 불었을 때 자동차 타이어에서 빼낸 튜브에 바람을 넣어 타던 일이며, 그것이 없을 경우에는 비료포대를 입구를 물에 대고 누르면 공기가 그 안에 갇혀서 훌륭한 물놀이 도구가 되기도 했지.(그러고 보니 비료포대만큼 농촌에서 여러 용도로 사용하던 것도 드물었다. 썰매, 튜브, 돗자리에다 비옷으로까지 사용했으니...)
물놀이는 퐁당퐁당 개헤엄을 치거나, 편갈라 물싸움을 하거나 쬐끄만 공을 가지고 멀리 던져놓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기도 했지. 입술이 새파래질만큼 물속에서 놀다 추우면 바깥으로 나와서 햇볕이 따뜻하게 데워놓은 바위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다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지.
가끔은 용진강까지 가서 놀았는데 나는 국민학교 시절에는 수영을 잘하지 못해서 강을 혼자서 건너지는 못했고 나룻배 뒤를 붙잡고 퐁당거리며 강을 건너던 기억이 난다.
그 외에 벼포기 사이에 뛰어 다니는 개구리를 잡아서는 밀짚으로 바람을 넣어 배를 빵빵하게 해놓고는 괴롭히던 일, 밀뱀을 잡아 가지고 놀다가 뱀이 지쳐서 축 늘어지면 그 위에 소똥을 얹어놓고 오줌을 누던 일-그러면 정말로 뱀이 다시 깨어난다. 정말로-들이 생각난다.
여름철의 또 하나의 기억은 역시 서리지만 주변에 별로 참외나 수박 원두막이 없어서 기억이 많이 나지는 않지만 순해, 춘선이랑 함께 순해네 뒷밭의 복숭아를 서리하던 일은 생각이 나고, 마늘쫑을 뽑아서 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매워하던 일도 생각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던 놀이는 어른들이 하는 것을 흉내내는 것들도 많았는데, 농악놀이가 그 대표적이야. 징대신 찌그러진 남비를 두드리고 상고라고 해서 문종이로 몇 미터나 되는 꼬리를 모자끝에 달고 돌려대곤 했지.
죽은 사람을 메고가는 상여놀이도 많이 하던 놀이였는데, 나름대로 꽃상여를 꾸며 메고 가면서 처량한 구령소리를 따라하곤 했었지.(구슬프고 처량하게 들렸던 상여소리의 일인자는 역시 준희 아버지였는데...). 상여놀이의 끝은 역시 묘지를 만드는 일인데 묘지를 발로 고르면서 또 한바탕 놀이를 벌이곤 했는데...
그 외에도 전기가 들어올 때 전주를 세우는 모습도 따라했고, 발로 밟아서 벼나 보리를 타작하는 '와랑'이라는 기구를 돌리는 놀이를 따라하기도 했지.
내가 나름대로 기억을 몇 가지 되살려 보기는 했지만 이 외에도 더 우리의 놀잇감을 많았던 것 같은데... 생각나는 대로 수시로 수정하도록 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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