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우리가 살던 동네에 얽힌 전설 3가지와 노래가락 한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예전에 용진살다 면서기를 거쳐 단양군청에서 근무하시던 윤수경씨가 수집한 이야기들로 책으로 엮어져서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글은 단양군청 홈페이지에서 발췌하였다.
홈페이지에 있는 것은 약간 말이 어색하고 불분명한 표현들이 있어서 내가 조금 손을 봤으나 가능하면 원문에 있는 내용을 훼손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이 글을 빌어 항상 우리 고향에 대한 관심을 가져 주시는 윤수경 님께 존경을 표하며, 이글의 저작권은 그 분한테 있으므로 추후 이 글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시어 연락을 주시면 즉시 삭제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 첫번째 이야기 : 용진나루의 유래
용진나루는 한강이 수운선이 자주 오가던 조선시대에는 뱃길의 출발지이며 기착지로서 소금을 실어나르던 유명한 나루터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사실 단양군이 조선시대에는 영춘현에 속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얘기다.
또한 옛부터 1병두 2느티 3덕천이라고 하여 수운교통이 발달하던 당시에 번성했던 살기좋은 마을을 칭는 얘기가 널리 퍼지기도 했다.
한일합방 전에는 의병활동이 활발했는데 그 당시에 작전을 위하여 용진나루의 여울목을 도강하기도 했다고 하며, 일제시대에는 만주에서 들여온 콩깻묵을 배급받기 위하여 경상, 충청, 강원의 3도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리기도 했었다고 한다.
또한 1950년대는 소백산의 원시림을 벌채하여 용진나루에서 뗏목처럼 엮은 후에 한강을 통하여 서울로 날랐는데 이 때문에 전국의 목상과 뱃사공이 모여들었다.
옛부터 단양의 1병두 2느티 3덕천이란 유행어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이야기는 수운 교통이 발달할 때 출발지역의 잇점을 표현한 말이다.
원래 동네 이름이 병두였으나 용진으로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믿거나 말거나의 전설이 전해오는데 얘기인 즉 커다란 용이 꿈틀거리며 마을 앞의 강을 거슬러 오사리 쪽의 용탄으로 올라가는 것을 마을사람들이 보고 동네이름을 용용자 나루진자를 써서 용진이라 지었다는 얘기이다.
60년대만 하여도 정월 보름과 10월 달에는 용왕제를 지내던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하며, 뗏목을 모는 뱃사공들 중에는 밤중에 용의 형상을 보고서 뗏목 위에서 무사 귀환을 비는 용왕제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오히려 북벽 위에서 내려다 본 강과 절벽의 모양새에 착안하여 지었다는 얘기가 더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그곳에서 보면 꼬리를 느티에 두고 용진나루부근을 몸통으로 삼아 오사리쪽의 용탄을 향하여 힘차게 치고 올라가는 용의 형상을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용이 승천하기 위해서는 오사리 부근의 깊은 용탄까지 가야 하는 데 일제시대에 이 꿈틀거리는 몸통부분에 혈을 박아서 상류로 올라갈수록 물이 얕아져 용이 승천하지 못하고 하방소에 머물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요즈음은 용이 마실 수 있는 강물이 점점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류의 영월발전소 등에서 혼탁한 물을 흘러 내려 보내고, 도로개설공사 등으로 날아온 돌이 용의 머리와 눈에 상처를 입혀서 이 때문에 마을에 불행한 일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마을 노인들은 앞으로 추진될 북벽지구 개발이 용의 등에 상처를 입혀서 마을의 운세가 점점 쇠퇴해질 것을 염려하고 있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댐을 막아서 깊고 맑은 물과 놀 자리를 용에게 제공해 주면 마을의 운세가 좋아질 것이며, 용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느티, 오사리까지도 번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 두번째 이야기 : 용소에 얽힌 전설
동대 2리에 속하는 용수마을에서 산 밑에 맑은 샘물이 퐁퐁 솟는 곳이 있다. 소백산의 형제봉과 배틀재의 준령, 태화산에 안겨서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여 가뭄도 타지 않고 힘차게 솟는 이 물을 용소물이라고 하며 이 샘물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하고 있다.
용소물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에 대한 얘기는 없지만 샘물이 생기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노부모를 모시고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는 방씨라는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심성이 착하고 예의범절이 밝아서 마을에 칭송이 자자했으며, 모든 부부들이 방씨 내외만 같았으면 걱정이 없을 거라고들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이 부부에게도 한 가지 걱정이 있었으니 바로 그들 부부사이에 아이가 없는 점이었다. 옛날에는 칠거지악이라고 해서 여자가 아기를 낳지 못하여 그 집안의 대를 이어주지 못하면 큰 죄로 여겨서 친정으로 쫓겨나든지 아니면 첩을 얻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부인을 쫓아낸다거나 첩을 얻으려는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고 부부의 금실은 소문이 자자할 만큼 좋았는데, 그래도 부인은 자식이 없음을 죄스럽게 생각하여 용소에 와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 후 부인의 지극한 정성이 효험이 있었는지 결혼한 지 5년 만에 태기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10개월이 지나도 아기는 태어나지 않았고 결국 12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출산을 했는데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부모님과 온 동네의 축복 속에 몸을 풀고서 삼칠일(21일간) 동안 문 밖 출입을 삼가며 산후조리를 했습니다.
한 달 쯤 지난 어느 날 방씨 부인은 아기를 이불 위에 눕혀 두고 이웃집에 잠깐 볼일을 보러 갔다 왔습니다. 방문을 열려고 하다가 방안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 문구멍으로 안을 들여다 본 순간 깜짝 놀라서 팔을 떨면서 문을 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겨우 한 달된 아기가 반짇고리에 담겨있던 명주실을 꺼내어 방구석의 양쪽 모서리에 실을 매고서 그것을 잡고 건너기도 하고 밟고 다니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란 방씨부인이 자기도 모르게 인기척을 내자 아기는 명주실을 순식간에 걷어서 반짇고리에 집어넣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더니 잠을 자는 척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는 아기를 유심히 보았으나 다른 아기와는 다른 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은 일부러 이웃집을 가는 척하다가 돌아와 살펴보니 아기는 어제와 똑같은 행동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옷을 벗기고 몸을 살펴보았으나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목욕시키다가 겨드랑이를 만져보니 딱딱한 것이 만져지길래 자세히 살펴보니 겨드랑이 양쪽에 작은 비늘처럼 날개가 돋아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용맹한 장수는 겨드랑이에 비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떠돌곤 했기 때문입니다.
부인은 며칠간 고민하다 남편에게 아기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얘기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힘이 센 장수가 태어나면 관가에 신고를 하여야 했는데 그 이유는 커서 역모를 꾸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릴 때 죽여 없애려는 것이었다. 더구나 커서 잘못하여 역적으로 몰리는 경우에는 삼족을 멸하는 벌을 받게 되므로 방씨 내외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부부는 아기나 부모님이 듣지 못하게 바깥으로 나와서 담장 아래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밤을 새면서 의논을 했습니다. 그러나 손자 본 것을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시는 부모님께 차마 말씀 드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방씨 내외는 나중에 잡혀가서 고생하면서 죽느니 차라리 우리 손으로 아기를 죽이는 것이 좋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먼저 아기를 엎어놓고서 광에서 안반을 꺼내다가 그 위에 눌러두고서 문밖으로 나왔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니 울음소리가 그쳐서 이제 죽었나보다 하고 부인이 문을 여는 순간 아기가 안반위에서 앉아 방긋방긋 웃으며 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안반 - 시골에서 떡을 만들 때 그 위에 올려놓고 떡메로 내려치곤 하던 나무로 만든 큰 판을 얘기하는 것이겠지. 또는 칼국수를 할 때 밑에 받침으로 사용하던 길고 넓적한 판.
부인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아기를 얼싸 안고서 하염없이 울어대자 남편이 아기를 빼앗아 안반으로 다시 누르고 옆방에서 가져온 콩 한가마니를 더 얹어 놓았으나 울기만하지 죽지 아니하자 마루에 놓아두었던 콩 한가마니를 다시 얹었다.
그러나 울음소리만 더 커질 뿐 죽지를 않자 부모님이나 마을 사람들이 달려 올까봐 두려워 또 다시 콩 한가마니를 더 얹었습니다. 그러자 울음소리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고 콩가마의 흔들림도 적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을 울고 있는 아내를 방밖으로 데리고 나온 후 문을 봉하고는 두 부부가 부여잡고 안타깝게 흐느껴 울었습니다. 결국 아기는 새벽이 되자 죽고 말았습니다.
부부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모님께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죽은 지 3일째 되던 날 죽은 아기를 계속 방에 둘 수가 없어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부모님은 통곡을 하며 아기의 시신을 보려고 하였으나 부부는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아기가 죽은 지 3일째 되는 날 정오 무렵이 되자 갑자기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치더니 샘물에서 말 한 마리가 솟아오르더니 방씨 집 근처를 맴돌면서 슬피 울고 길길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동네사람 모두가 무서워하며 불안해 하였는데 이 용마도 3일간을 길길이 날뛰며 울다가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후에 용마가 태어난 샘물을 “용소”라 하고 그 말이 울다가 죽은 곳을 “용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용소는 상수원과 농업용수로 주로 사용하다가 요즘은 송어양식장으로 이용하고 있고, 용가는 지금은 경작지가 되어 농사를 짓고 있다.
이 전설에 따라 동네 이름을 용소마을 또는 용수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 세번째 이야기 : 용진의 느티나무에 얽힌 얘기
용진을 들어가다 보면 초입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전설이 한 가지 있는데 지금부터 350 여년 전인 조선 인조 때 아직 느티나무가 작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에 용진강변은 소금배의 정착지가 출발지이기도 했고 수상교통의 요지로서 삼도의 풍류객과 잡상인이 몰리기도 했었으며, 또 뗏목과 띠배의 종착지이자 출발지였으므로 영월, 정선, 평창 등 강원도와 풍기, 부석, 소천 등 경상도 및 충청도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자루 왕래를 하던 곳이었다. 특히 북벽을 비롯한 용진강변은 경치가 아름다워 영월, 영춘의 선비들이 봄가을로 즐겨 찾아 풍류를 읊거나 뱃놀이를 하며 시를 짓는 등 유생들이 집합장소이기도 했다.
이 느티나무는 용진강과 500m 남짓한 거리의 마을 어귀에 있었는데, 강변에서는 갈대밭에 매어놓은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흰모래와 자갈밭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지만 마땅히 쉴만한 자리가 별로 없었기에 수령이 3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느티나무 아래는 장기와 바둑을 두는 사람, 일하다가 휴식을 취하거나 낮잠을 자는 사람 등 여러 사람들이 나무 아래 그늘을 차지하려고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어느 날 나무 그늘 아래서 장기를 두고 있던 한 젊은이 곁을 지나가던 스님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곳이 용나루라, 용나루라! 그렇지만 용은 승천하진 못하겠구만! 나룻배가 논밭을 지나가겠구만.”
호기심이 발동한 젊은이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자세히 이야기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그 스님은 “빠르면 5갑자 늦어도 6갑자(1갑자는 60년)에 천지개벽을 한번 할 것이오. 그런데 이 느티나무를 잘 키우면 그때 이 나무에다 저 강변에 매어둔 배를 맬 날이 올 것이며, 또 개벽이 일어난 후 십년이나 이십년 후면 저 배도 없어지고 나루도 없어질 것이오. 이 나무를 잘 가꾸어 두시오 만약 나무에 피해를 입히는 자가 있다면 그만큼 신체의 어느 부분이라도 다치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던 주위사람들은 조용히 사는 마을의 민심을 동요시키는 처사라며 화를 내었다. 강가에 매어놓은 배가 논밭위로 다닌다면 마을 전체가 물바다가 되고 논밭도 못 쓰게 되며 5, 6갑자 후에 마을이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니 화가 났던 것이다..
처음에 말을 붙였던 젊은이와 술기운이 도는 주민 몇 사람이 합세하여 “미친 놈의 땡초 중, 배고프면 밥 동냥이나 할 것이지 남의 동네 망치는 이야기만 하고 다닌다.”며 붙잡아 혼내주려고 하자 스님은 “두고 보아라 내말이 거짓말인가. 나중에 내말이 맞을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야”라고 소리치며 안 잡히려고 마을 쪽으로 도망을 쳤다.
그런데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혹시 異人이 아닌가 생각하고 마을로 들어와서 노승을 본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이 사람이 낮잠 자다가 잠이 아직 덜 깨어 잠꼬대를 하는 게 아니냐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혼자 생각에 ‘음! 과연 그 스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틀림없이 도사일거야. 도사님 말이 맞어. 나 혼자라도 한번 느티나무를 잘 가꾸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이후로 나무를 보살피면서 집안의 고민이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정월달에는 나무주변에 금줄을 쳐놓고 정월과 가을에 마을 수호신으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은 절 받은 나무라면서 가지를 자르거나 해하지 아니하였으며, 느티나무는 350여 년간 아름드리 나무로 성장했다. 20년 전만 하여도 이 나무에 기우제를 지내거나 제사를 모시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으며, 특히 여름철에는 나무 아래서 모내기 점심밥을 나누어 먹거나 팻물꾼들의 교대가 이루어졌다.
* 팻물 - 나도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보니, 모내기 전후하여 가뭄이 들 경우에 15-20마지기 단위로 패를 짜서 교대로 논에 물을 대는 것을 말한단다.
나무를 괴롭힌 사람들은 반드시 피해를 본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에 사는 조씨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나무가지를 베어서 땔감으로 이용한 후 집안에 좋지 아니한 일이 자주 생기고 아들 둘이 미쳐서 5년 내에 둘 다 죽었다.
또 김모씨는 정월 대보름날 이 나무가 그리 신통한지 내가 한번 시험해 보겠다면서 고목나무에 불을 질렀는데 나무꼭대기까지 연기가 자욱하여 죽은 줄 알았던 느티나무가 겨우 되살아난 후에 김씨는 병으로 3년간 고생하다가 죽고 말았다고 하며, 역시 나무에 불을 지른 유모씨는 처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큰소리를 땅땅 쳤는데 불을 놓은 지 3년 만에 이 마을을 떠났고 그 후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이 나무를 해하려는 사람이 없어졌으며, 새마을 운동으로 마을 안길을 포장할 때에도 나무를 그대로 두었으며 현재까지 잘 보호하고 있다.
그 스님의 예언대로 300여 년이 지난 1972년 8월 18일과 19일 사이에 영월, 평창, 정선, 주천지방에 시간당 320밀리가 넘는 집중호우가 내려서 영월의 동강철교에 미루나무와 초가집이 떠 내려와 걸렸고, 서강 쪽에서 내려온 폭우에 뿌리째 뽑힌 나무가 동강 인도교에 걸려서 영월지역이 완전 침수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춘지역은 비가 많이 오지 않았다.
결국 이 물난리로 동강철교와 동강 인도교가 유실되면서 직선거리 16㎞ 하류의 용진나루에 급류가 들이닥쳤고, 급기야 용진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25채가 넘는 가옥이 침수되어 피해를 입었다.
그 당시 점점 남한강 물이 불어나기 시작하자 주민들이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나룻배를 끌어올리고 보니 강가에 있던 큰 나무들은 다 물에 잠기었기 때문에 강나루에서 6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하나밖에 없는 느티나무에 이 나룻배를 매어서 겨우 배를 떠내려 보내지 아니할 수 있었다.
72년의 큰 수해가 지나간 후 10여년이 지나면서 밤재길이 뚫려 도로가 개설되고 용진으로 시내버스가 다니기 시작했으며 90년대 이후로는 결국 뱃길을 찾는 사람이 없어졌고 배도 완전히 사라져서 노승의 예언이 모두 맞아떨어졌다.
###### 네번째 이야기 : 시집살이가(용진리에서 구전되던 민요)
은가락지 끼든손에 휴무잘기 웬말인고
감둥갑신 신든발에 짚시기가 웬말인고
이듬매고 거듭매고 삼시시골 거듭매고
종무증심 다나와도 요네증심 안나와서
삽작문을 들어스니 호랑같은 시아버이가
장대같은 대를물고 씨야씨야 매눌씨야
밭이라도 맷골매고 시를찾고 때를찾아
증심참을 찾아왔나
한골매고 두골매고 삼시시골 거듭매니
종무증심 다나와도 이네증심 안나와서
배가고파 들어왔소
안방문을 들어서니 고치같은 시어머이가
쑥대같은 대를물고 씨야씨야 매눌씨야
밭이라도 몇골매고 시를찾고 때를찾어
증심참을 찾아왔나
한골매고 두골매고 삼시시골 거듭매니
동내증심 다나와도 요네증심 안나와서
배가고파 들어왔소
정지문을 들어스니 앵두같은 시누이가
맵씨같은 쌀을씨며 씨야씨야 올케씨야
밭이라도 맷골매고 시를찾고 때를찾어
증심참을 찾아왔나
한골매고 두골매고 삼시시골 거듭매니
종무증심 다나와도 이네증심 안나와서
배가고파 들어왔소
삼녘묵은 보리밥에 코리타분 튀장에다
깃없는 숫가락을 십리만치 던져주니
가네가네 나는가네 절로절로 나는가네
가요가요 나는가요 시어머님 나는가요
가네가네 나는가요 시아버님 나는가요
열두폭 치마타서 바랑짓고 꼿갈짓고
한재를 넘어가니 각게같은 낭군님이
나귀난장 뛰어타고 와랑처럼 오는님이
님아님아 우리님아 우리부모 천년살며
우리부모 만년사나 날보나마 니리오게
나기난장 니리시고 님을타처 들어가니
하든야단 다안하고 소리쳐서 좋다하네
이상이 우리 용진리와 동대리에 얽힌 전설이었습니다.
'✒️ 긴 생각 짧은 글 > 3. 나의 살던 고향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련한 기억들 - 2. 놀이하면서 부르던 노래들 (0) | 2008.09.04 |
---|---|
아련한 기억들 - 1. 권체부 아저씨 (0) | 2008.09.04 |
나의 살던 고향은 - 4. 고향의 개천과 강에서 자주 보던 물고기들 (0) | 2008.09.04 |
어릴 적 기억 - 2. 재미있는 놀거리들 (0) | 2008.09.04 |
어릴 적 기억 - 1. 재미있는 놀거리들 (0) | 2008.09.04 |
나의 살던 고향은 - 2. 하늘에서 내려다 본 내 고향 모습 (0) | 2008.09.04 |
나의 살던 고향은 - 1. 소백산 기슭을 산골마을 (0) | 2008.09.04 |
정겨운 고향 사투리(4) - 충북 단양군 영춘면 (0) | 2008.09.04 |
정겨운 고향 사투리(3) - 충북 단양군 영춘면 (0) | 2008.09.04 |
정겨운 고향 사투리(2) - 충북 단양군 영춘면 (4) | 2008.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