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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의 살던 고향은

국민학교 - 2.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동네서 제일 큰 집

by 무딘펜 2008. 9. 2.


  지난번 동창회 때 가보니 운동장이 정말 좁아 보이더라만 그 시절에는 정말 세상을 품을 만큼 넓었다. 주변으로는 측백나무로 둘러져 있었고 군데군데 플라타너스나 버드나무가 서 있었다. 양쪽으로는 축구골대가 세워져 있었고, 한 쪽 옆에는 골대가 빨간색과 흰색으로 번갈아 칠해진 핸드볼 골대가 있었다. 교문 우측으로는 탈 때마다 삑삑 소리를 내는 쇠줄로 된 그네가 매달려 있었고, 그 옆에는 반질반질하게 닳은 미끄럼틀과 시이소오가 놓여 있었다.

  교문 왼쪽으로는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쇠봉으로 되어 있는 놀이기구가 있었고 그 옆에 철봉과 평행봉이 세워져 있었는데 철봉 앞에는 모래판이 있어서 가끔 그곳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거기서 조금 건물 쪽으로 조금 더 가면 배구장이 있었는데, 해마다 여름철 쯤이면 4H회원들이 클럽대항 배구대회 연습을 하곤 하던 것이 생각난다. 우리들은 가끔 그곳을 피구장으로 사용하곤 했지만.

  조회나 행사때 사용하던 연단은 운동장 정면에 놓여 있었는데 아마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어졌던 것 같고 새마을 운동 즈음에 시멘트 연단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연단아래에는 각종 운동기구나 자질구레한 것들을 보관할 수 있도록 작은 쪽문이 달려 있었다.

  운동장에서 교실로 올라가는 길은 네 개가 있었는데 연단 바로 뒤로는 교무실 쪽으로 통하는 시멘트로 만든 계단으로 주로 선생님들이 이용하셨고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왼쪽에 국기게양대가 있고 그곳을 지나면 바로 둥그렇게 큰 멋진 향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맨 왼쪽에 있는 길은 그냥 경사로로 되어 있어서 차량이나 리어카를 위한 통로로 이용되었고, 맨 오른쪽 백엽상 있는 곳은 시멘트로 되어 있어서 가끔 가위바위보로 한계단씩 먼저 올라가기 시합을 하거나 운동선수들이 체력단련을 위해 오르내리는 용도로도 사용하기도 했다.

  중앙계단 말고 약간 오른쪽에는 내 기억에 돌계단이 있었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통로였다. 땡땡땡땡... 조회 종이나 중간놀이 종이 울리면 그 길을 통해 학생들이 우 몰려 내려오거나 끝나자 마자 누가 일등으로 들어가는가를 겨루기 위해 서로 다투어 뛰어 오르던 기억이 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1등으로 들어가려고 기를 쓰고 뛰었는지...

  교실건물은 4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앞에 있는 두동은 슬레이트 지붕이었는데  왼쪽 건물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는데 이곳의 중앙에는 교무실이 있고 그 왼쪽으로 교장실, 도서실, 자료실이 있었고, 교무실 오른쪽은 교실 두 개가 있었다. 이 두개의 교실벽은 간이식으로 되어 있어서 졸업식과 같은 중요한 행사를 할 때는 두 교실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 강당처럼 사용했다. 다른 건물은 나중에 지어진 건물인데 교실 두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뒷쪽은 양옥식으로 지어져 있었는데 양옥식 건물 중 왼쪽 건물로 올라가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가끔 그곳에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아마 주위에 사시는 선생님 댁에서 고추 말리는 장소로도 즐겨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건물에는 교실이 3개가 있었는데 맨 왼쪽은 탁구장으로 사용했었다. 

 오른쪽 건물은 교실 두 개가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건물 옥상에 올라가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이 건물이 슬레이트 지붕이었는지 옥상이 있는 양옥식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리네...

  우리는 1학년 때는 앞에 있는 오른쪽 건물, 2학년 때는 뒷쪽의 오른편 건물, 3-5학년 때는 뒷쪽의 왼편 건물, 6학년 때는 교무실이 있는 건물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여튼 1학년 때 우리 반 교실은 운동장에서 바라보면 오른쪽 앞에 위치한 건물의 첫번째 교실이었다... 맞지? 바깥에서 복도로 들어가는 문은 아래쪽의 레일을 따라 도르레가 움직이는 여닫이 문이었다. 가끔 고장이 나면 삐익하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곤 했지. 복도는 나무로 되어 있고 기름을 먹여 반질반질했는데 골마루라고 불리곤 했다.

  그 문을 통과하면 교실에 들어가는 문이 나오는데 그 문 뒤에 숨기도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미닫이 문이었던 것 같다. 판자로 된 문에 위쪽으로 작은 유리가 달려 있어서 가끔 자습시간에 선생님께서 감시용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헷갈리는 사실은 왼쪽에 있던 교무실이 있던 건물에는 교실문이 여닫이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더 오래된 건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실에 들어가면 두 사람이 같이 쓰도록 되어있는 녹색의 책상과 역시 둘이서 앉는걸상이 있었는데 오래된 것이라서 가끔 못도 튀어 나와 옷을 찢기도 했고 생채기가 생기기도 했다. 책상에는 한쪽에 못이 박혀 있어서 운동모나 책보를 걸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책상마다 칸막이는 되어 있지만 뚜껑은 없는 서랍이 있었는데 학교 오자마자 도시락을 필두로 공책들 그리고 그 위에 책을 정리하고 옆에는 필통을 가지런히 정리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학교가 파하면 책상 위에 책보를 펼쳐놓고 책상서랍 속에서 주섬주섬 책들을 꺼내어 돌돌 말아서 질끈 묶은 다음 둘러 메고 집으로 향하곤 했다.

  교실 앞쪽에는 짙은녹색 칠판이 있었고 양옆으로는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새끼칠판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오선지가 그려진 음악시간용이었다. 칠판에는 사용하지 않을 때는 가려놓을 수 있도록 헝겊으로 된 칠판 가리개가 철사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칠판 옆쪽에는 못이 하나 박혀 있었는데 거기에는 길이가 1미터쯤 되는 나무로 만든 지시봉이 걸려 있었는데, 그 용도는 칠판에 있는 내용을 가르키며 설명할 때, 괘도를 넘길 때, 그리고 공부 못하거나 잘못을 했을 때 손바닥 때리는 데 사용이 되었다.

   그리고 칠판에는 분필로 글씨를 썪는데 문교분필이라고 상표가 붙은 흰색이 주종이었지만 가끔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 분필도 사용하기도 했다.

  칠판 바로 밑에는 나무로 만든 교단이 있었는데 나를 포함하여 키 작은 아이들은 그 교단에 서서도 칠판 위에 글을 쓰려면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교단 밑에는 자질구레한 뭔가를 넣어 두기도 했는데 무엇인지는 기억은 안난다. 교단 바로 앞에는 교탁이 있었는데 그 위에 선생님이 책을 펴놓고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치시곤 했고, 교탁 안에는 2단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어서 책이나 교보재를 넣어두시곤 했다.

  요즘은 어떨지 모르는데 그 당시에는 담임 선생님 책상이 교실 안에 같이 있었다. 책꽂이에는 주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한 책들이 놓여있었고 서랍은 대부분 자물쇠로 꼭꼭 잠겨있었다. 가끔 선생님께서 피곤하시면 우리에게 자습을 시키고 책상에 엎드려 주무시기도 했는데 스커트를 자주 입고 다니셨던 2학년 담임 여선생님은 주무시는 모습 때문에 짓궂은 개구쟁이들의 얘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뒤쪽에는 사물함 비슷한 것이 커튼으로 가리워져 있고 한 쪽 옆에는 청소 도구함이 있었지. 그 청소 도구함 속에 빗자루와 걸레와 먼지털이 그리고 기름병이 들어 있었어. 요즘 애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나무판자로 만든 골마루에서 생활을 했고 청소시간에는 빗자루로 한번 쓸고 나서 걸레에다 그 기름을 묻혀서는 윤이 반들반들 나도록 골마루를 문지르곤 했었지. 그래서 청소가 끝나면 항상 교실 안에는 참기름, 들기름, 콩기름 냄새가 뒤섞여 고소한 가운데 종례가 이루어졌던 걸로 기억한단다.

  수업시간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교무실 앞 쪽에 매달려 있는 종을 치곤 했는데 시작할 때는 세 번, 끝날 때는 두 번을 쳤었고 우리는 그것을 '들어가'종 '나가'종이라곤 부르곤 했던 것 기억하니? 참 조회시간에는 다섯 번을 쳤었지. '빨리 모여라'..ㅎㅎㅎ

  일주일에 세번 정도 운동장에서 아침 조회가 있었단다. 월, 수, 토요일이었는데 그 때가 되면 전교생이 모두 학년별로 줄을 서서 다소곳이(유재성... 장난 치지마!) 교장선생님의 끝도 없는 훈시를 듣곤 했어. 

  그 때 학교 건물 양쪽에 있던 구형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앞산에 울리면 가끔 개그코너에서 정종철이 흉내내는 임곡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목소리가 어쩌면 그리 내 어린시절과 같을까하고는 미소를 짓곤 한단다. 기억하니? 그 스피커는 서울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에서 사서 보내줬다고 우리는 대신 산에 올라가 싸리비를 만들어서 보내 줬던 일... 하긴 오전 두시간이 끝나면 그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리듬에 맞추어 중간놀이라고 해서 무용이나 체조도 하곤 했었지.

  우리 학교 운동장은 온통 측백나무로 둘러 싸여 있고 그 안쪽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나스 나무들이 장승처럼 서 있었지. 축구골대랑, 핸드볼 골대, 배구 네트가 있었고 한 쪽으로는 그네랑 미끄럼틀이랑 시소가 있었지.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랑이었던 것은 학교건물 바로 앞에 있던 회양목벽과 3층, 4층으로 다듬어져 멋진 맵시를 자랑하던 향나무였는데 그것은 소사(김씨) 아저씨의 부지런함 덕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단다.

  학교건물 오른쪽으로는  흰색 페인트를 칠한 나무울타리로 막아놓은 구역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토끼장처럼 생긴 백엽상이 놓여 있었고 그 옆의 풍향계가 한가로이 바람을 타고 어기적 대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우리들이 사용하던 화장실(변소) 생각나니? 두 건물의 중간에 위치한 하나밖에 없던 화장실. 지금은 시골 터미널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지린내 가득한 소변기와 예닐곱 개 밖에 없던 재래식 "똥깐". 겨울을 제외하고는 구더기가 우글거렸는데 가끔씩 횟가루를 뿌리거나 할미꽃 뿌리를 넣어두면 배를 하얗게 깔고 죽어 나던 모습과 - 사실 기억에 더 남는 건... 가끔 밖으로 기어 나온 놈들을 실수로 밟았을 때의 그 더러운 기분 $-#-&-@ - '누구는 누구랑 연애한대요!' 라는 글이 주류를 이루었던 화장실의 낙서들...

 화장실 옆에는 토끼장이 있어서 앙고라라는 하얀색 토끼를 키웠웠지. 늦봄부터 가을까지는 여자 애들이 청소를 하는 대신 토끼풀 뜯는 것이 남자 애들의 일과 후 할일 중의 하나였었어. 지금 와서 하는 얘기인데 토끼풀을 핑계로 산에 가서 놀기도 많이 했지. 늦가을이 되면 녹사료도 준비했었고... 한번은 뒷산에 토끼풀 뜯으러 갔다가 태영이가 벌에 눈을 쏘여 며칠간 퉁퉁 부어다니던 일도 기억난다.

 그 옆에는 양옥식의 숙직실이 있었는데 그 건물 옆 방은 건빵을 나눠주던 곳이었지. 밀가루 포대에 가득 든 지금 파는 건빵보다 서너 배는 커보이는 건빵은 매주 금요일에 학교 뒷쪽의 신작로를 따라서 포장을 둘러친 제무시가 운반을 하곤 했는데 이것을 나눠주는 일은 대체로 여자선생님께서 담당하셨고, 건빵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 우리 중에 덩치가 제법 큰 용구나 순해가 가서 건빵을 가져오곤 했었지.

  이 부분에서 2학년 때 담임이셨던 이복순 선생님이 생각난다. 몇몇 여학생들만 편애한다고 우리 남자애들이 불만이 많았다는 사실 알고는 있니? 이분이 특별히 몇 명한테는 건빵을 더 많이 준다는 얘기가 있었지..

  숙직실 옆 쪽에는 우리가 저학년일 때까지는 두레박이 달린 우물이 있었었지? 저학년들은 위험하다고 거의 사용을 못해봤다. 그 후에 학교 건물 한 켠에 절골 쪽에서 물을 당겨오는 수도가 생겼는데 그 후에 모터를 이용하여 지하수를 끌어 올려 이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옆에는 용구와 순해와 광오와 오달이의 피땀이 서린 연못과 분수가 있어서 금붕어가 한가로이 노닐곤 했었지. 그것 만들 때 리어카를 끌고 전 속력으로 운동장 왼쪽의 가파른 길을 치달리던 우리 용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뒷쪽의 교실건물 두 동 이외에도 사택이 네군데 정도 있었지. 한채는 한옥이었는데 그곳은 교감선생님이 주로 사셨지. 김선화네도 그곳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다. 그 집의 창고는 솔방울이나 장작, 갈탄과 같은 겨울철 난로에 땔 연료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했었다.

  교실건물 바로 옆에 있는 양옥집은 교무주임 선생님이 사는 집이고 그 뒤쪽에 있는 집은 교장선생님, 그리고 나머지는 고참선생님 중에서 한 분이 사는 집이었는데, 우리 담임인 김정송선생님도 그 집에 사셨다.

  자! 학교풍경을 중심으로 한 서론은 이정도로 끝낼까 한다.

  다음에 시간 있으면 다른 내 나름대로의 기억의 보따리를 풀어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