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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생각 짧은 글/3. 나의 살던 고향은

국민학교 - 3. 학교 주변의 풍경들

by 무딘펜 bluntpen 2008. 9. 2.

지난 번에는 학교 풍경을 주로 얘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그 주변에 대해 얘기를 해보자.

  지금 생각해 보니까 예전에 우리가 입학하던 당시에는 교문이 두 개였었다. 지금 남아있는 교문 이외에도 남국이네 집 방향으로도 교문이 하나 있었지. 그 옆에 상당히 큰 버드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그 것을 벗어나면 학교 운동장을 둘러서 조그만 개울물이 쫄쫄 흐르고 있었다.

  교문 바깥으로 해서 올라가면 남국이네 집이 나왔는데 남국이네 이사오기 전에는 그 집에서 구멍가게를 했었지.   남국이네 집을 지나서 더 올라가 보자. 주로 기억나는 것이 가게들인데 당시에는 영남이로 불리던 용님이네 집을 오른쪽으로 두고 지나치면 왼편으로 담배를 팔던 남국이네 친척집이 있었고 거기를 바로 지나면 나오는 김태규 선생님 댁 가게에서는 잡화류와 함께 약을 팔았지.

  사모님께서 다른 시골여성들과는 달리 항상 화장을 하고 계셨었고 특히 빨간색 루즈를 짙게 바르시는 적이 많았다는 기억이 있어. 가끔씩 집에서 누가 아프거나 하면 동대리까지 걸어가서 약을 사오는 심부름을 하곤 했는데, 아무리 늦은 밤중이라도 문을 열고 약을 주시던 생각이 난다.

 거기를 지나면 5거리 광장(?)이 나오고 역시 잡화류가 주종인 가게 한 곳과 막걸리를 팔던 술집(나중에 그 주인 아주머님이 영춘에서 용동집을 하시던 분 맞지?)이 있었지.

  남자애들은 누구나 이 부분에 대한 비슷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겠지만 쭈그러진 주전자에 막걸리 심부름을 하면서 눈치채지 못할 분량만큼만 주둥이에 입을 대고 혀끝으로 막걸리를 훔쳐 먹던 추억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막걸리 맛보다도 감미롭다.

   그 술집과 같은 건물 반대편에는 이발관이 있었지. 이발관에 들어서면 커다란 거울과 앞쪽에는 정말로 통속적인 냄새가 풀풀나는 풍경화 그림이 두 개 걸려 있고 이발사 아저씨는 짜각짜각 소리가 나는 기계로 머리를 시원시원하게 밀어 놓고는 가죽에다 면도칼을 싹싹 갈아서는 면도를 해주곤 하셨지.

   나는 물론 지금도 키가 작지만 그 때는 우리 같은 꼬마들은 대부분 이발의자 위에다 판자조각을 하나 더 얹고 그 위에 올라앉아서 머리를 깎았는데 그 자리에만 앉으면 왜 그리 졸리웁던지... 흔들어 깨우시는 아저씨에게 붙들리어 빨래비누와 거의 요즘은 운동화 닦을 때나 씀직한 솔로 머리를 빡빡 문질러 감기우고 나서야 설렁한 뒷통수를 매만지며 이발관을 나올 수 있었단다.

  지난해에 유학갔다 돌아와서 고향에 가보니 그 이발사 아저씨가 요즘은 우리 진커리로 이사를 하셔서 근옥이네 바로 아랫집에 살고 계시더라.

  자 이제는 다시 빠꾸하여 남국이네 집 근처로 돌아와 보자. 그 곳에서 앞산 쪽으로 한사람 밖에 못 지나갈 좁은 길을 내려가면 냇가가 나왔지. 엉성하게 만든 돌다리가 있긴 하지만 장마 한번 지나면 떠내려 가버리곤 했어.

   그 냇가가 바짝 말라버리는 겨울철이면 그 냇가 옆으로 큰 돌들 몇 개 치우고 대강 정리하면 GMC(제무시) 산판차들이 운행하는 도로가 생겨서는  용진강을 아홉살이를 통해 건너는 길로 연결되었었지. 그 때는 왜 그리 산파차가 멋져 보이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움직이는 차를 타고 다니는 운전수랑 조수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내 기억에는 그 당시 구형 트럭은 마치 경운기 시동 걸듯이 앞쪽에서 조수가 땀을 뻘뻘흘리며 시동기를 돌리던 모습이 떠오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들 중에 몇 명은 장래 꿈이 트럭 조수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던 걸 생각하면 씁쓰레한 웃음이 입가에 피어난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다 우연히 트럭을 만나면 책보를 들쳐 메고는 차 뒤에 매달려 오는 재미도 있었는데 들키면 기를 쓰고 쫓아오는 조수를 피해서 삼십육계 줄행랑 치던 기억도 아스라하다.

  냇가에 대한 또 한가지 추억은 4학년 정도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김정송 선생님과 같이 개울가에서 우리 반 전체가 물놀이를 한 적이 있었지. 장마가 막 지난 시점인 걸로 기억하는데 그 때 여자애들은 저 멀리 아래 쪽에 떨어져서 쭈삣쭈삣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는 쟤들이 왜 저렇까 하고 의문을 가졌던 게 생각난다. 참! 그 때 우리가 뭘 입고 있었지?

  내가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2학년 때 쯤 전학 왔다 1년만에 간 용진교회 목사님 아들이었던 김진이라는 친구 생각 때문이다. 한번은 학교 끝나고 우리 동네 앞의 개울가에서 같이 물놀이를 하는데 그 녀석이 팬티를 입고 있더라. 문제는 집에 갈 때까지 팬티가 안 마르니까 그냥 겉옷을 입을 상태에서 바깥으로 한 발씩 빼어서 팬티를 짜는 것 있지?

   그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렴. 하여튼 나는 선생님과 목욕할 때 우리 중에 팬티 입은 놈은 없었고 다들 반바지에 웃통을 벗고 있었다에 만원 걸었다. 이의 있는 사람 근거를 제시하도록 해라.

  그 개울가를 건너 산 쪽으로 상여막을 지나면 초색(푸색골)과 좌송에 사는 애들이 학교를 오가는 꼬불꼬불 산길이 보였었지. 아침에 등교할 때 보면 그 쪽 사는 애들은 꼭 표가 나더라. 뭣땜시? 한결같이 책보자기를 등과 어깨를 가로질러 질끈 동여매고 살짝 다리를 걷은 완전 촌티 패션이면 분명히 그 산골길을 달려 온 애들이라고 생각하면 십중 팔구는 맞았던 걸로 기억해.

  김준호, 황정하, 황규석, 박헌해가 그 중에 속했던 것 같은데 나는 김학종이 생각난다. (미안하지만) 머리크기에 비하여 공부는 그리 잘하지 못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3학년 때였나 4학년 때였나 학교를 땡땡이까고 도망가는 것을 우리 반 남자애들 몇 명이 쫓아가서 끌고와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 그 애가 무지하게 화를 내며 눈물을 글썽이더구나. 결국은 같이 졸업을 못하고 말았지만 언젠가 한 번 만나고 싶다.

  국민학교를 생각하면 학교 이외에 가장 익숙하게 뇌리에 와 박히는 것은 조산담(우리는 조산태미라고 불렀으나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음)이다. 위풍당당한 아름드리 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고 길 옆에는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돌로 높이 쌓아올린 쉼터가 있던 곳.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한번도 들은 적은 없지만 아마 용진리(특히 우리동네 진커리)와 동대리 사이의 경계구실을 하곤 했지. 대보름날 깡통 돌리며 쥐불놀이 하다가 동대리 애들과 싸움이 붙으면 가끔 돌팔매도 오고가고 결국 애들 싸움이 어른들까지 가세하는 싸움으로 번진 적이 있었단다.

  앞산 얘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뒷산으로 가 보자. 며칠 전에도 얘기했지만 토끼풀 뜯으러 정말 뻔질나게 다녔었지. 아직도 어디쯤으로 길이 나고 어디에서 구부러지는지 다 기억난다. 토끼풀로는 아카시아와 칡넝쿨을 주로 많이 뜯어 왔었지. 그리고 뒷산 중턱을 약간 올라가면 봄에 진달래가 많이 피었었는데 가끔씩 그것을 꺾어 와서는 교실 뒤쪽에 4홉 짜리 소주병에 물을 담아서 꽂아두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우리 교실에는 진달래 와 철쭉 이외의 꽃이 꽂혀 있었던 적이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뒷산은 그것 말고도 퇴비증산, 녹사료 채취, 겨울철 난로 불쏘시개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솔방울 따기를 위해서도 자주 누비던 곳이었었지. 퇴비 베다가 손가락 다친 일이며, 뱀이 나와 기겁을 했던 일 또 꿩병아리 쫓아가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이제 학교를 주변으로 한 반경 1킬로미터 이내는 대강 설명이 되었는데 풍경설명을 마치기 전에 우리 동네 진커리에 대해 조금 더 얘기를 해 볼까나.

  다른 부분은 다들 기억을 하리라고 생각하는데 너희들 한창남이라고 아냐? 우리 동네에 물레방아간이 두 개가 있었단다. 냇물을 길을 돌려서 우리 키의 서너 배도 넘는 큰 수차를 돌리고 그 수차에 피댓줄을 걸어서 방아를 찧는 그야말로 물레방아였는데 마을 복판에 나중에 용진 본동으로 이사간 호열이 형네 방앗간과 용진 들어가는 입구 쪽에 창남이네 방앗간이었지.

  방아가 한창 돌아가는 가을까지는 항상 주변에 깻묵 냄새가 자욱했고, 쉬는 철인 겨울에는 수차에 매달린 고드름이 참 멋스러웠다. 창남이 아버지는 덩치도 크고 무척 호탕한 분으로 방앗간을 운영하시다 보니 거의 날마다 기름에 쩔어서 조금 시커먼 인상을 가지셨는데 창남이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의 억양이 너무 재미있어서 우리도 종종 따라하곤 했단다. 뭐라구 했냐구?창남아! 몽끼 가온나. 빨리 안 가오면 확 치빠쁜다.ㅎ ㅎ ㅎ.

  하여튼 76년도 였었던가 큰 장마로 온통 마을이 잠겼을 때 물레방앗간 두 개 다 떠내려가 버리고 창남이네는 우리 집 앞쪽에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집으로 이사하여 1년 정도 살다가 타지로 떠난 후 소식이 끊겼다.

  자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 하고 다음 기회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