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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생각 짧은 글/3. 나의 살던 고향은

국민학교 - 5. 우리의 추억은 난로가에서 피어난다.

by 무딘펜 bluntpen 2008. 9. 2.

  나 지금 휴가 중이다. 3일 연휴....부럽지!!! 집에서 푹 쉬면서 어린시절의 추억에 대해 정리를 해 보았다. 그 중에서 오늘은 난로에 대하여 얘기해 보자꾸나...

  우리의 많은 추억들은 따뜻한 난로가를 중심으로 피어난다.

  그 당시의 겨울은 왜 그리도 바람도 차고 추웠던지. 겨울철이면 대부분 손이 터서 쩍쩍 갈라지곤 했기에 안티푸라민이라는 투명하고 끈적거리는 약을 손에 바르고 다녔는데 파스냄새랑 비슷했던 그 냄새가 교실을 진동하곤 했었지.

  그리고 겨울철 등교복장은 거의 완전무장수준이었어. 내복착용은 물론이고 커다란 빵모자 속에 토끼털이 속에 든 검정색 프라스틱 귀마개를 착용하고, 또 양쪽이 끈으로 연결된 두터운 벙어리 장갑을 끼는 것은 기본 복장이었고, 그 외에도 토끼털 목도리나 하얀색 파카를 입은 경우도 많았지

  그리고 싸늘한 목재 복도로부터의 한기를 막기 위해 양말 위에 겹쳐 신던 덧양말 기억난다. 어떤 애들은 집에서 손수 어머님이 떠주신 것을 신거나 비닐 재질로 된 것을 사서 신기도 했지.

  그런데 당시에 우리는 바닥에 기름칠이나 양초를 칠한 후에 걸레로 닦아서 반들반들 윤을 내었기 때문에 바닥이 상당히 미끄러웠는데 그 위에서 미끄럼을 타거나 서로 밀쳐서 넘어뜨리는 놀이를 즐기기도 했지. 덕분에 양말이나 덧양말은 바닥이 닳아서 반질반질하고 구멍도 금방 나긴 했지만...

   하여튼 그 막강한  추위에 웅크렸던 어깨들도 난로가에만 다가가면 난로는 딴 세상에서 온 천사인양 따뜻한 온기로 우리를 감싸주곤 했지.

  우리가 주로 사용하던 난로는 무쇠로 만든 동그란 난로였는데 위에 뚜껑이 있고 그 옆에 알미늄으로 된 연통이 올라가다 기역자로 꺾여서 창문 밖으로 연기를 배출하는 것이었지. 그 연통을 지탱하기 위해 철사줄을 매어 천장에 연결했고, 연통 중간에는 불조심이라고 쓴 팻말이 붙어 있었지.

   겨울철에 난로를 피우기 위해서는 자리배치를 다시하곤 했는데 교실 앞 부분을 비우고 분단을 세 개로 나누어 가운데 분단은 뒤로 물려서 작게 만들었지. 그러면 맨 창 쪽이나 벽쪽에 앉는 애들은 자기자리로 들어가려면 꼭 다른 사람의 자리를 양보받아 들어가야 했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일부 아이들은 남의 책상을 발로 밟고 넘어 다니기 일쑤였어.

  아침에 일찍 와서 난로 피우는 것은 주번이 주로 담당하는 중요한 일과였었지. 어떤 때는 2명씩 1개조가 되어 난로당번이 따로 임명되기도 했다.

  연료는 장작, 솔방울과 갈탄이었는데 운동장 옆쪽에 있는 교감선생님 사택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어서 힘센 애들 몇 명이 가서 장작 한 아름과 솔방울 한 바께스, 그리고 갈탄을 네모진 나무통에 담아서 들고 왔지.

  먼저 난로 속에 솔방울을 집어넣고 그 위에 바짝 마른 장작을 난로 안에 집어 넣은 후에 그 밑에서 종이로 불을 피우곤 했지. 어떤 때는 쉽게 불이 붙었지만 장작이 제대로 마르지 않은 경우에는 교실 안에는 온통 너구리가 잡는 연기가 퍼져 전부들 콜록거리고 그러면 추운 겨울이라도 할 수 없이 창문을 열어두곤 했고, 불 피우던 주번은 눈물을 글썽이며 불길을 살리기 위해 입으로 호호 불거나 플라스틱 책받침으로 부쳐대곤 했지.

  일단 장작에 불이 붙어서 어느 정도 타면 다음은 탄을 땔 차례. 주전자에 담아두었던 물을 탄에다 붓고 탄을 삽으로 개어서는 불타고 있는 장작 위에다 떠 얹으면 갈탄 특유의 그 냄새-연탄 땔 때와 비슷한 냄새-가 온 교실에 퍼지곤 했지.

  탄에 어느 정도 불이 붙으면 쇠꼬챙이를 이용하여 몇 군데 구멍을 뚫어두면 임무 끝. 이제는 두 시간 정도 마다 한 번씩 탄을 떠 얹어 주면 되는 거지.

  탄이 빨갛게 피어오르면 난로가 빨개지고 심지어 연통부분까지 달아오르면 그 주변에 앉은 아이들의 얼굴도 빨갛게 변하곤 했지.

  오전 수업 중 세시간 째를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전부들 도시락(뺀또라고 해서 양은으로 만든 것인데 세련되게 변또라고 발음하는 분도 있었지만)을 꺼내들고 서로 좋은 자리에 자기 도시락을 올려놓으려고 우르르 몰려들곤 했어. 역시 이것을 정리하여 도시락에 물을 부은 후에 차례대로 난로위에 올려놓는 일도 주번의 임무.

  네시간 째의 중간정도 되면 따뜻한 난로 덕에 꼬박꼬박 조는 아이들의 콧속으로 도시락 속의 밥이 눌는 냄새와 도시락 밑에 깔아놓은 김치익는 냄새가 솔솔 파고 들면 미칠 듯한 시장기에 위장이 요동을 치곤했지.

  그러면 다시 선생님께서 주번에게 명하여 도시락의 위치를 바꾸도록 하셨고 주번은 뜨거운 도시락을 집게를 이용하여 내려놓은 후에 위치를 바꾸어 하나씩 올려놓았었어.

  네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은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어. 시골답게 도시락 반찬이 변변찮았지만 김치 하나로도 충분히 우리는 행복했었지. 멸치나 계란말이, 또는 오뎅(얘들아 그때 햄을 싸온 애도 있었냐?)같은 것을 싸온 친구의 도시락은 주위 사람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어 정작 본인은 다른 사람 것을 얻어먹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지.

  난로에는 도시락만 데워먹는 것은 아니었지. 우리에게 급식으로 주어지던 건빵을 난로위에 얹어져 노릇노릇하게 구워먹는 것은 기본이었던 그 당시에 많이 유행하던 쫀드기라는 것 기억나니?

  길다랗고 넙적하게 생긴 색색의 쫀드기를 난로에 대고 구우면 부드럽게 변하지. 그것을 실처럼 한올 한올 쪼개어 먹던 그 달콤함이랑 한 올이라도 얻어 먹으려 다투던 친구들의 모습이 난로의 그 둔탁하던 쇳빛 색깔과 함께 클로즈업되어 떠오른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가 되면 난로는 그대로 열기를 뿜어대고 식곤증에 항복하여 코를 골면서 조는 애들까지 있었고, 그러면 선생님은 조는 사람을 불러내어 앞에서 손들고 벌을 서게 하든가 분필로 정조준을 하여 사격을 하기도 하셨지.

  하긴 졸다가 많이 걸리는 사람은 복도로 나가서 오돌오돌 떨면서 한동안 서 있게 하기도 했는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쇠로 된 레일위로 도르레를 통하여 드르륵 드르륵 열리도록 되어 있는 교실문을 열고 나가는 친구들의 모습이 무척 애처러워 보였었지.

  5교시 이후에는 탄을 더 이상 넣지 않지. 왜냐하면 이제 불을 꺼야 하니까. 6교시가 끝나고 청소시간이 될 때까지 난로에 열기가 있으면 거기에 물을 부었지. 그러면 푸시시식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온 교실을 뒤덮었고 잿가루가 펄펄 날리기도 했어.

  청소당번은 이 난로를 이단으로 분리하여 난로재가 든 아래 부분을 들고는 교실 뒤편의 퇴비장 옆에 있는 학교 소유의 밭에다 갔다 뿌리고 오면 이제 임무 끝.

  난로땔감으로 쓰기위한 솔방울 따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지. 두 세명당 하나씩 가마니를 가져오게 해서는 고학년들은 하루 날 잡아 솔방울을 따러 산으로 올라갔지. 땅에 솔방울이 많이 떨어져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는 소나무를 잡고 흔들거나 나무위에 올라가 몽둥이로 후려쳐야만 했거든. 특히 나무를 잘 타던 애가 황정하랑 김준호였던 것 같다.

  솔방울과 함께 바짝 마른 솔잎이나 마른 나무등걸도 같이 줍어 담았는데, 송진이 잔뜩 묻어 있는 나무뿌리 근처의 등걸은 '고주백이'라고 해서 땔감으로 인기가 있었지.

  솔방울 따기는 주로 학교 뒷산에서 하였는데 산위에서 신작로까지 솔방울이 가득 찬 가마니를 날라다 놓으면 마을 어른 중에서 자원하신 분이 우차를 끌고 왔지. 바뀌 두 개 달려서 소가 끌던 우차 알지. 그 위에 솔방울 가마니를 가득 싣고 남국이네 집 근처에 부려 놓으면 그것을 교감선생님 사택에 있는 창고로 날라서 부려놓곤 했지.

  솔방울 말고도 장작도 많이 필요했는데 학교에서 나무를 샀었는지 누가 기증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트럭으로 한차 가득 나무를 날라다가 사택 앞 마당에 부려 놓으면 역시 우리의 일꾼인 용구와 순해, 광오 같은 애들이 소사아저씨랑 슬근 슬근 톱질하세를 통하여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그 다음은 시퍼런 도끼날을 세워서 장작을 팼지.

    난로가에 관한 추억 또 한 가지는 도시락을 높이 쌓아올렸다가 실수로 도시락이 와그르르 무너져서 점심을 쫄쫄 굶었던 기억도 있었는데 그 때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도시락 얘기가 이왕 나왔으니 조금 더 해 볼까나.

    도시락은 얇은 양은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도시락 안에는 반찬통이 같이 자리를 잡았지. 처음에는 금색이었다가 사용할수록 칠이 벗겨져서 은색으로 변하곤 했지. 더구나 이리 저리 매치는 일이 많아서 쭈글쭈글한 것을 형이나 누나들로부터 물려받아서 사용하곤 했는데 그 안에도 밥을 꾹꾹 눌러서 담아가지고 다녔어.

  책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애들은 별 상관이 없지만 책보에다 싸는 경우는 이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지. 책보의 맨 밑바닥에는 공책이나 큰 책을 싸고 그 위에 교과서, 그리고 맨 위에 도시락과 필통을 넣고는 매듭을 지어 꼭꼭 싸가지고 다녔는데 대부분 허리에 두르거나 팔에 끼거나 X자로 어깨에 두르고 다녔는데 그러다 보니 반찬이 흘러내리는 경우가 많아서 책이나 공책이 김치 국물로 염색이 된 아이들이 많았었지.

  하긴 위에서 얘기한 뺀또 이외에 5학년 무렵부터 보온도시락이라는 것이 나왔지. 통 안에 스티로폼이 들어 있어서 점심시간까지는 따뜻함을 유지해 주던 신형 도시락. 그것도 사실 몇몇 형편이 좋은 애들만 싸가지고 다녔었지만 말야.

  난로 얘기를 하면 또 생각나는 게 있다. 5학년 때 교감선생님이시던 아버지를 따라 전학왔다가 1년 만에 다시 다른 곳으로 간 김선화라는 애 기억하니? 곱슬머리를 항상 묶고 다녔는데 공부를 무척 잘했지. 2학년 때 이후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내가 5학년 첫 번째 월말고사 이후에는 계속 그 애한테 쳐져서 2등에 머물러야 했었단다.

  그런데 난롯가에서 장난을 하다가 그 애 손을 데게 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별 것 아닌 상처 같은데 무척이나 아파하면서 손에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고 다녀서 속으로 나중에 흉터 생기면 어쩌나 걱정했던 적이 있었다.

    며칠 전에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 얘기를 했더니 그 사건은 기억하는데 그것이 나였는지는 몰랐다고 하더라.

  하여튼 그렇게 우리의 겨울은 함박눈처럼 포근하고 무쇠난로처럼 따뜻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