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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의 살던 고향은

국민학교 - 1. 코흘리개, 학생이 되다.

by 무딘펜 2008.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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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비록 폐교가 되어 전통문화교육원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 옛날 내 마음이 자라나던 동대국민학교의 모습 - 2008. 6. 24 동문체육대회]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도 국민학교 입학하고서부터가 내 대부분 기억의 출발점이다. 그 이전에 기억도 몇 가지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시점이 불분명하고 몽롱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1965년도에 단양군 영춘면 용진리 1반인 진커리라는 동네에서 7남매 중에 다섯째로 태어났다. 맨 위로는 큰 누나가 있고 그 다음이 나랑 10살차이가 나는 형과 바로 위로 누나 둘, 그리고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

  내가 태어나던 당시에 집안사정은 상당히 어려웠던 것 같다. 아버지는 아편과 술에 탐닉하셨다고 하는데 집에 붙어 계시질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린 나를 떼어놓고서 아버지를 찾으러 바깥을 많이 돌아 다니셨단다. 그 바람에 어린시절의 나는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서 매우 허약했는데 지금이야 그런 얘기를 듣지 않지만 예전에는 어머님이 나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어릴 때 젖허기를 앓아서 키가 안 컸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마 제대로 못 먹인 것에 대한 미안한 감을 갖고 계셨던가 보다.

  그에 대한 보상이었는지 어린시절의 나에 대해서는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한 끼도 굶기지 않으셨으며, 혹시라도 먹을 것이 생기면 나부터 챙겨 주시면서 나는 갓난아기 때 허기를 겪었기에 한 끼라도 굶으면 큰 일이 날 것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물론 중학교 때부터는 자취를 하면서 굶기를 밥먹듯이 하긴 했지만 어린시절의 나에 대한 어머님의 배려 덕분인지 그 이후에 나는 운동도 잘하고 체력도 남들보다 강하게 자랐던 것 같다.

  하여튼 국민학교 이전의 기억은 이렇다할 것이 없으므로 내 얘기는 코흘리개의 입학때부터 시작된다.

*** 이후 내용은 내가 국민학교 동창 카페에 올린 내용을 그대로 옮겨온 글들이 많아서 표현이 조금 어색할 수도 있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년도가 1972년이었다.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날 밤에 학교가기 전에 이름은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아버님의 엄명에 따라 형님한테 잡혀서 하루 종일 내 이름자를 쓰던 일이 생각난다. 형님이 드문드문 점을 찍어서 내 이름을 써 두면 그것을 연결하여 내 이름을 완성하는 방법이었는데, 별로 재미도 없고 지겨웠던 기억이 있다. 이름을 혼자 쓸 수 있으면 놀러 나가도록 허락하겠다는 형의 제안덕분에 후딱 해치우고 밖으로 뛰쳐 나갔었다. 하여튼 나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분명히 내 이름은 쓸 줄 알았다는 사실...

  어색한 맞선 자리에 나오는 색시처럼 부모님의 손을 잡고 기대반 두려움 반으로 처음 우리가 만난 날을 기억하는 사람 있니? 나는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첫째는 가슴 한켠에 달아놓은 손수건인데 대부분 흰색이었지 아마. 지금도 그 용도에 대해 매우 궁금하다. 그 때는 대부분 누런 코를 많이 흘리고 다녀서 위생상 휴대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어렴풋한 짐작은 가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한 기억도 없고 또 언제부터 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름표도 기억난다. 가게에서 산 녹색이나 파란색 바탕에 투명비닐을 씌운 것이었는데 그 안에 “동대초등학교 1학년 1반 몇 번 김윤석”이라고 크게 이름을 써서 핀으로 왼쪽 가슴에 달고 다녔다. 옷을 갈아입다가 깜박 잊고서 안 달고 학교에 가면 교문을 지키던 고학년인 주번학생한테 이름을 적히고 기합을 받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 이 부분에서 헷갈리기 쉬운 것이 주번과 당번인데 당번은 돌아가면서 청소를 하거나 다른 애들이 집에 간 다음에 교실문을 잠그고 가거나 하는 역할을 하였고, 주번은 고학년 중에서 중고등학교 선도부처럼 권력층에 속하는 애들이었다. -

  두번째로 기억에 남는 일은 나는 검정고무신을 신고 나이론으로 만든 책보(기억하지?)를 둘러메고 학교를 다녔는데, 친구들 중에서 몇 사람은 만화 주인공이 멋지게 그려진 운동화(사실 운동하는데 신는 신발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고무신 이외에는 다 이렇게 불렀다)에 역시 알록달록 그림이 그려진 멋진 책가방은 등에 지고 왔었다는 사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왜 그리 부러웠던지... 아마도 철이랑 성렬이, 희복이가 그런 친구 중에 속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1학년 때 담임은 안병찬 선생님이셨지? 조금 연세가 드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그 당시에 40대 정도 되지 않으셨을까? 학교 들어가기 전에 누나들한테 정말 맘씨 좋은 분이라는 얘기를 들어서 첫인상부터가 좋았고, 또 언제나 인자하게 우리를 대해 주셨다는 느낌은 있지만 아쉽게도 너무 어린 시절이라서 그분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단다. 

  마지막으로 담임선생님에 대해서는 안병찬, 이복순 선생님을 거쳐서 3학년 1학기에는 이정일 선생님이 잠깐 담임을 맡으셨고, 그 이후 전운환 선생님이 3학년 1학기를 맡으시다 전근 가신 후에 김정송 선생님이 우리 담임이 되셨지.

  키가 작은 편이셨지만 운동도 만능이었고 노래도 잘 부르고 서예글씨도 잘 쓰셨지. 욕심도 많으셔서 우리 반이 무조건 전교에서 일등을 해야 한다고 다그치기도 하셨지.

  동대리에서 사모님을 만나서 결혼을 하셨는데 아이가 없으셨지. 나는 가끔 선생님 댁에 가서 서가에 꽂힌 책을 읽곤 했는데 그 때 읽은 - 읽으려고 시도한 - 책 중에 쿠오바디스라는 책이 생각난다. 일주일 이상을 끙끙대었지만 결국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채 포기를 했지.

  그 이후 청주로 전근을 가신 후에는 소식이 끊겼는데 언제 꼭 초청을 해서 같이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처음에 학교 들어갔을 때 우리반은 62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숫자는 가끔 헷갈린다. 지금 연락이 안되는 친구들도 몇 명이 있고 벌써 우리 친구들 중에서도 세명이나 벌써 유명을 달리했네. 삼가 명복을 빈다.

  사실 오래된 일들이라 친구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정확히 기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은 너희들도 이해를 하겠지. 그래도 토막토막난 작은 기억들이나마 엮어서 이번 크리스마스를 추억해볼까 하는 생각이다.

  한 가지 걱정되는 일은 어린시절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사실 이야기와는 달리 개인적인 이야기는 내 기억이 정확치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기억은 친구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혹시라도 이글을 읽어보고 기분이 상하거나 사실과 다른 경우는 즉시 댓글을 주거나 전화를 연락을 하기 바란다. 즉시 그 부분을 삭제할 것을 약속한다.

  하여튼 다른 일들은 기억이 잘 나는데 친구들에 대한 일은 그렇게 또렷하지 않으니 무슨 까닭일까?

  지난 번 모임에서 옥순이랑 우리가 입학할 당시에 몇 명이었던가에 대해서 이견이 있었는데 나는 왠 일인지 62명으로 기억하고 있거든.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54명 이상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56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

  회원명부에 있는 47명 이외에 이우기, 김학종, 이재선, 강성민, 한창남, (고)최창원, (고) 박상호가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한계다. 그래도 54명인데 나머지 두명은 누구일까? 정말 궁금하다.

  내가 가장 기억을 잘 할 수 있는 애들은 역시 진커리에서 같이 학교 다니던 애들로 홍순해, 문춘선, 문근옥, 권차연, 권미재, 이우기, 한창남 그리고 나까지 8명이었다.

  학교에 관한 것 이외에도 함께 한 추억이 너무 많아서 뭘 얘기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우리 반에서 제일 키가 컸던 순해는 어릴 때는 언님이라 불리웠단다. 그리고 이름답게 무지하게 순했는데 그 큰 키에도 불구하고 가끔 씨름을 하면 나한테 진적도 많았지. 그 당시에 인기있던 코미디언인 배삼룡씨와 이기동씨에 빗대어 순해와 나를 비실이와 땅딸이라고도 불렀었지.

  춘선이와 근옥이는 사촌간이지. 진커리 제일 윗집에 살던 춘선이는 어릴 때는 그리 키가 큰 편이 아니었지 아마. 집에 놀러가서 가끔 밥을 얻어먹곤 할 때면 집에 있던 숟가락이 우리가 보통 쓰던 것이 아니고 군용이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미재는 우리 바로 아래 집에 살았는데 그 집 앞으로 겨울이면 따뜻하고 여름이면 너무 차가와 1분이상 발을 담그기 힘들 정도인 샘물이 퐁퐁 솟아 나오는 샘터가 있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배나무가 있었단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이 그랬지만 특히 미재는 어릴 때는 코를 많이 흘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차연이는 그 바로 아랫집에 살았지. 차연이의 달리기 실력에 대해서는 누차 얘기했으니 넘어가고 굉장히 나이드신 할아버님이 사셨는데 장이 설 때마다 영춘을 꼭 다녀오시던 기억과 길가로 나있는 사랑방의 봉창을 제키면 바로 눈 아래로 동네애들이 항상 모여서 왁자지껄하던 골목길이 눈에 보였었지.

  창남이네 방앗간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했고, 용진가는 길목에 살던 우기네는 한동안 술장사를 했었지. 우리 당고모네로 형제가 넷인데 전부들 괄괄한 성격들이라 용진사는 애들은 그 앞을 지나갈 때 아마 몇 번 맞은 기억들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걸.

  희복이는 홀로 계시는 어머님께서 무척 깔끔하게 키우셨던 것으로 기억난다. 선생님들 중에 몇 분은 희복이네 집에서 하숙을 하기도 하셨지. 1학년 때 반장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

  곽영숙이랑 곽문숙은 자매였었지. 영숙이가 나이가 우리보다 많았는데 무척 예쁘고 당찼었다는 기억이다. 2학년 때 학교를 그만 두었지. 앞에서 얘기했듯이 고무줄놀이하다 남자애들이 줄을 끊고 달아나면 악착같이 따라가던 모습이랑, 동생인 문숙이를 끔찍이도 아끼던 모습도 기억이 난다.

 여자 애들 중에서 가장 덩치도 크고 괄괄했던 애가 함연순이었지. 조금 덩치가 있는 편이라 남자애들이 놀리기도 했는데 특히 재성이가 심했지. 청소시간에 책상을 뒤로 밀고 빗자루로 바닥을 쓸을 때 꼭 재성이가 화를 돋우어서 연순이가 잡으려고 교실 안을 뛰어 다니던 일이며, 한번 잡혀서 맞으면서도 낄낄대던 재성이의 웃음소리가 생각난다.(조금 전에 함연순과 채팅했는데 대학다니는 딸애가 이번에 장학금을 탔다고 하더라. 연순이도 공부 잘했었는데, 역시 딸애가 엄마를 닮았나보다.)

  말똥구리로 불리던 한인규는 얼굴에 주근깨가 눈에 띄는 애였는데 글씨를 참 차분하게 잘 썼지. 4학년 때 이후로 시험문제나 학습자료 정리한 것을 인규가 철펜으로 긁어 써서는 등사기로 밀어서 나누어 주던 일이 생각난다.(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97년도 경에 속세를 버리고 스님이 되어서 예산 근처의 어느 절에 있다고 한다. 나무 관세음보살...)

  나춘득은 4학년 이후로 거의 내 짝꿍이었지.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책상 위에 칼로 금을 그어 놓고는 넘어오면 죽어하고 협박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 금이 아마 내 쪽이 넓게 그어 놓았는데도 한마디 불평없이 묵묵히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쬐끔 미안한 생각도 들었었단다. 그런데 춘득아! 너 수업시간에 정말 많이 졸아서 내가 옆구리 많이 쥐어 박은 것 기억나니?

  내 짝꿍으로 또 한사람 생각나는 사람은 김영순이다. 나머지 공부를 하다가 내가 짜증을 내며 머리를 쥐어박은 적이 있었는데 막 눈물을 흘리며 울더구나.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기억이 있다. 영순아 정말 미안했다.

  선녀라고 이름지으면 다 이뻐지는지 궁금하다. 용진에는 김선녀, 동대리는 최선녀(나중에 본명인 최성례로 바꿨지.) 둘 다 예쁘장하게 생겼었지. 김선녀는 눈이크고 나름대로 성격도 괄괄했는데 무용을 잘해서 이복순 선생님의 총애를 받았었는데 2학년 때 그만 두었지. 최선녀는 정말 성격이 얌전했는데 한번은 그 애를 학교에서 놀렸는데 학교 끝나고 용소마을 고모네 집을 가다가 그 애 오빠랑 딱 마주쳐서 혼난 적이 있다.

  성열이는 어릴 적에 책가방을 메고 다닌 몇 안되는 애 들 중의 하나인데 어릴 적에 동렬이라고 불리웠던 것 같은데 맞니? 동생과 함께 우리 동네 앞 쪽의 한길로 세발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모습이 떠오른다. 각종 오락시간에는 빠질 수 없는 감초였었지.

  성열이와 재성이는 정말 장난꾸러기들이었지. 칠판 오른쪽 귀퉁이의 떠든 사람-가끔 반장인 내가 적거나 주번이 적기도 했지-에는 항상 이름이 적혀 있었어. 성열이의  국민학교 다닐 때 별명이 뭔지 다들 알지?(나중에 성열이한테 들은 얘기인데 그 별명을 무척 싫어 했다니까 앞으로 부르지 마. 문자도 왔다. 삭제하라고.)

  태영이는 조금 특이한 걸 좋아하던 성격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정말 손재주가 좋았었지. 용소마을이 고모네 바로 앞집에 살았기 때문에 많이 어울려 놀았는데... 길가로 나 있는 마루에 앉아서 놀던 일이랑 코를 훌쩍이며 땅뺏기를 했던 일이 기억난다. 여름방학 중의 어느 날에는 태영이가 모의를 해서 자기네 복숭아를 서리했던 기억도 있으니 내가 말한 특이한 애였다는 표현이 이해가 되니?

  은순이는 딸부자 집에서 태어났지. 몇 명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자매들이 무척 많았던 것만 기억난다. 공부를 잘하고 착했는데 한번 화가 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남자애들한테도 덤벼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착했던 은순이가 아직 결혼을 안하고 있다니 세상 남자들이 눈이 삐었나 보다. 그치!

  진기연은 무척 까무잡잡한 친구였는데 아버님도 피부색이 검은 편이셨고, 거무실의 우리 외갓집 앞에 살다가 용진으로 이사를 갔지. 찐개미라고 놀렸던 일은 생각나는데 나중에 보발로 전학을 가버렸다. 지난번 송년모임 때 전화로는 통화를 했는데 다음 기회에는 꼭 만나보고 싶다. 많이 하얘졌겠지?

  창원이는 갸름하고 어릴 때부터 약간 병색이 있었지. 성격이 강하고 논리적이라 누구와 말싸움을 해도 지지 않던 애였지. 운동도 참 잘했는데 많이 뛰고 나면 앉아서 숨을 헉헉대며 괴로워하던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삼가 명복을 빈다.

  최고로 털털했던 애는 산골돼지로 불리던 박상호였다. 목소리 자체가 벌써 걸걸해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고 싶게 친구들과 어울리던 애였는데... 제천에서 상호 화장시키고 돌아오면서 나도 인생의 무게와 앞으로의 삶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을 해보았단다.

  용구 역시도 워낙 내 얘기에 자주 등장하지. 달리기 잘하고 힘이 좋아 순해와 함께 항상 작업반장을 했던... 용구네 집에 놀러가면 머리가 새하야시던 아버님께서 잘들 놀다 가라고 웃으며 반겨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헌해도 코를 많이 훌쩍였지. 5학년 즈음에 운동장에서 장난치다가 도망가는 것을 내가 다리를 거는 바람에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는데 정말 미안했다. 우리 어머님은 너를 내가 팔 부러뜨린 일로 항상 기억하신단다.

  김영숙에 대해서는 힘이 무척 세어서 남자애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는 기억과 함께 주사 맞는 일을 무척 싫어했던 기억이 있다. 1학년 때 였던가. 혈액형 검사를 위해서 귓볼을 살짝 찔러서 혈액채취를 했는데 사실 귓불은 감각이 둔해서 거의 아픔을 못느낌에도 불구하고 그걸 안 할려고 마구 몸부림쳐서 선생님이랑 간호사랑 남자애들 몇 명까지 가세해서 겨우 피를 뽑은 적이 있다.

  남국이는 학교 바로 옆에 살았는데 점잖고 공부도 잘했지. 왜 남국이 별명이 땅콩이었는지는 기억은 나지 않고 남국이네가 길 쪽으로 쬐그만 가게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남국이는 중학교 때도 공부를 잘해서 장학생으로 수도공고를 졸업하고 지금도 한전에 근무하고 있다지?

  미향이는 골안서 살았었는데 무척 예쁘장하고 새침떼기였었지. 나랑 먼 친척뻘이었는데 오빠-보식이형-가 괄괄한 성격이라서 남자애들이 함부로 괴롭히지는 못했었어. 지금 청주에 살고 있다구? 한번 보고 싶다. 보식이 형도...

  용소마을에서 방앗간을 하던 경선이도 성격이 참 좋았지. 경선이네 집에 놀러가서 TV를 보던 일이랑 방앗간에 들어가 밀기울을 훔쳐먹던 기억이 새롭고, 아직도 그곳을 생각하면 발동기 돌아가던 그 소음이 들리는 듯 하다.

  부잣집 외아들처럼 생겼던 철이는 시골 아이답지 않게 항상 깔끔하게 차려입고 다녔었지. 철이를 생각하면 가끔씩 학교에 찾아오고 하시던 멋쟁이 철이 어머님이 생각난다. 지금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데 모임을 잘 이끌어 주길 바란다.

  용소마을 살던 광오와 오달이도 말썽꾼 축에 끼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달이가 목사님이 되셨다니 놀랍군. 광오랑은 말똥바우 쪽으로 개구리 잡으러 같이 갔던 기억이 있고, 오달이는 우리 고모네 뒷집에 살았었는데 담 너머에 큰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어서 많이 따 먹었는데...

  준희는 예나 지금이나 무슨 일에든 적극적인 성격이었었지. 나의 큰아버님께서 용진에 채마담이라고 소실을 두어서 내가 자주 그 집에 놀러갔었는데 그 때마다 준희와 많이 어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신에 어떤 때는 저네 동네라고 못 오게 한 적도 있었지.

  언젠가 준희와 한번 엉켜 싸웠는데 준희가 코피가 났었지. 어릴 적에 코피나면 지는 것 알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까지 끝까지 쫓아왔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준희 형인 용희형한테 잡혀서 혼났었지.

  준호는 키가 작은 편에 속했는데도 힘이 무척 세어서 팔씨름에서 다른 덩치 큰 애들을 제압했던 기억이 있고 리어카를 끌고 무척 빨리 달리던 모습도 생각난다. 지난번 송년모임 때 보니 예전 모습과 하나도 안 변했더라.

  진만이는 손가락이 무척 굵고 어릴 적부터 힘이 세었지. 가장 학교에서 먼 골안에 살았기 때문에 아침마다 책보를 둘러메고 뛰어서 등교를 해야했겠지.

  장춘자도 어릴 때 덩치도 크고 공부를 참 잘했었지. 2학년 초까지는 춘자가 공부를 1등을 했었는데 그 이후에 내가 1등을 하면서 춘자가 손바닥을 맞던 일이 생각난다.

  강성민이란 애는 정말 키도 작고 얼굴도 조막만 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무척 적고 여릿하게 생겼었다는 기억이 있는데 언제 전학 갔는지도 모르겠다.

종진이는 키도 크고 달리기도 잘 했었는데 용구한테 밀려서 빛을 못 봤지? 차연이네와 친척이라서 우리 동네에도 자주 놀러 왔었는데... 젊은 시절에는 술을 많이 마시두만 이번 모임에서는 한 잔도 안하더라. 그래도 좋아 친구야.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소주면 어떻고 사이다면 어떠랴.

춘배는 앞에서 설명한 강남콩 사건이 가장 많이 떠오르고 춘배랑 한바탕 붙어서 내가 이긴 적이 있었는데 그 후에 용배형한테 불려가서 혼난 적이 있다.

규석이도 손재주가 참 좋았지. 규석이랑은 국민학교 추억보다 중학교 1학년 때 당시에 3학년이던 규석이 누나랑 우리 누나까지 네명이 같이 자취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영옥이는 복스럽고 예쁘게 생겼었는데 말할 때 약간 콧소리가 섞여 있었지. 한번은 영옥이를 놀렸다고 오빠한테 불려갔었는데 굉장히 점잖게 타일러 주던 일이 생각난다.

동대리(수발)에 살던 용님이는 남자이름같은 영남이로 불리웠었지. 눈이 크고 얼굴이 갸름하고 이뻤다는 기억과 평소에는 얌전했지만 화나면 무서워서 남자애들과 싸운 적도 있었지.

허순희는 거무실 살았는데 우리 외갓집에서 뒤편으로 좁은 물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쬐끄만 다리를 건너서 살았던 것 같다. 중학교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우연히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여기에 이름은 없지만 김옥순, 김석희, 김정희, 나숙자, 위태용, 이명숙, 황정하 같은 애들도 함께 했던 일이나 장면은 떠오르지 않지만 지금 어디서 만나도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자 이정도가 친구들에 대한 내 기억들이다. 누군가 보충을 해주기 바라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