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있는 글들은 동대국민학교 제21회 졸업생들의 카페인 다음의 "내 머리속의 동대초교21"에 게시했던 내용들을 거의 수정없이 옮겨놓은 것입니다.
딱 한반이었고 42명이 졸업했는데 제가 반장이었기에 어린시절 함께 뛰놀던 추억들을 정리를 해 본 것이며 친구들의 댓글을 참조하여 부분부분 수정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체가 주로 친구들에게 얘기하는 투이고 곳곳에 친구들의 이름이랑 사투리랑 이상한 지명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해하시고 읽어 주시길...
#######################################
먼저 우리가 뛰놀던 고향산천에 대해서 얘기를 시작해 보자.
우리가 어린 시절을 뛰놀던 고향은 용진리라는 강가마을과 동대리라는 산촌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변은 소백산맥의 자락으로 둘러싸여있고, 남한강의 상류가 바로 옆으로 흐르는 정말 산좋고 물좋은 동네다. (지금은 개발에 뒤처져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못사는 동네로 손꼽히고, 그래서 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을 등졌지만, 앞으로는 미개발되었다는 점이 오히려 장점이 되어 각광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속해 있는데, 강원도 영월과 경상북도 영주 그리고 충북 단양군의 경계가 만나는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의 억양을 들어보면 경상도인지 강원도인지 아니면 충청도인지 헷갈린다.
단양읍에서 구인사 방향으로 한시간 가량 들어가서 영춘면소재지에 당도한 후 거기서 935번 도로를 따라 밤재를 넘어서 4-5킬로미터를 더 가면 용진리의 관문인 진커리에 도달한다.
거기에서 두갈래 길이 나오는데 좌측으로 강을 향하여 내려가면 용진리로 가고 거기서 산속으로 들어가면 초색과 좌송이 나온다.
용진은 원래 병둔 또는 병두라고 불렀었는데 느티쪽에 꼬리를 두고 아홉 살이를 굽이쳐 오사리 쪽에 머리를 둔 용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龍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며,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소백산에서 베어낸 목재를 뗏목을 지어 서울까지 나르거나 소금, 보급품 등을 상류로 나르는 길목에 있었기에 한때 번성하던 나루터였다고 한다.
일제시대까지도 일 병두, 이 느티, 삼 덕천(상진가기 전의 강가마을임)이라고 해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로 손꼽을 정도로 작고 아담한 강촌마을이다. 올해는 장마로 인한 물난리가 나서 매스컴을 탈만큼 쑥밭이 되어 버린 점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지만...
양갈래 길 중 우측 길을 따라 똑바로 조금 더 올라가면 멋진 느티나무와 노송이 줄지어 서있고 돌로 쌓은 쉼터가 있는 곳이 조산태미(원래 조산담은 느티쪽에 있는 돌로 쌓은 작은 언덕을 가르키는 말인디...)이며, 거기서 멀리로 보이는 곳이 우리가 다니던 국민학교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소백산 수련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보수를 하지 않아서 꾀죄죄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아담하고 무척 멋진 건물이었다.
국민학교가 있는 동대 1리는 웃마을이라고 불리었고, 그 위로 동대2리가 펼쳐져 있는데 베트마을, 용수마을, 회실, 말똥바우 등이 935번 도로를 따라 위치했으며, 용수마을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져 소백산 기슭으로는 들어가면 산뱅이, 거무실, 골안 등의 마을이 있다.
935번 도로를 따라 영주방면으로 한참을 더 올라가서 베틀재를 넘으면 방랑시인 김삿갓의 묘가 있는 정말 정말 산꼴짜기인 의풍리가 있다.
의풍에는 당시까지도 1년에 쌀 한가마니를 가져다 주고 한문을 배우는 서당이 있었으며 동시에 국민학교도 하나 있었기에 우리와는 별개의 학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용진리와 동대리는 소백산맥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서 1,000미터가 넘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남동쪽이 형제봉, 서쪽이 태화산, 그리고 북쪽이 마대산이고, 동쪽으로는 베틀재, 남쪽으로는 밤재가 가로막고 있어서 우리들은 자동차보다 먼저 하얗고 긴 꼬리를 달고 날아가던 비행기를 보고 자랐다.
이 산 중에서 형제봉이 속해있는 소백산은 큰산이라고 불렸는데 동네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산에는 머루, 다래가 흔했고, 그곳에서 채취하는 소백산 송이버섯은 아직도 유명세를 타고 있으며, 두릅나무나 산호두(가래추자)나무도 많았다.
당시에는 주로 재래식 아궁이에 나무를 지펴서 난방을 하고 밥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화전을 많이 일구었기 때문에 큰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민둥산이었다.
산에는 동네마다 거의 한 두개씩 동굴들이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학교 앞산서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동굴과 거무실 사당 바로 뒤에 있던 큰 굴이다. 이 굴은 돌을 던지면 한참 만에 풍덩 소리가 날만큼 아래로 깊게 뚫려 있어서 혹자는 그곳이 온달동굴(남굴이라고 했었지)과 지하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얘기도 했었다. 믿거나 말거나...
또한 푸색골에도 큰 동굴이 하나 있다고 들었다. 가끔 어머님께서 옛날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6.25때 푸색골에 있는 동굴 속에서 피난생활을 했던 얘기를 해 주곤 하셨다. 언젠가 한번 가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못 가보고 있다.
이 소백산에서 시작하는 개울물은 용소마을에서 양쪽 지류가 만나서 동대천을 이루며 동대리마을을 끼고 흘러 내려 용진에서 용진강과 합류한다. 개울가에는 피라미, 송사리, 메기, 쉬리, 게리, 미꾸라지, 꾸구리(표준말이 뭔지 모름) 같은 물고기가 많이 살고 있었고 겨울철에는 식용개구리도 많았었다.
특히 우리 어린시절에는 물이 무척 맑아서 놀다가 목마르면 그냥 개울에 엎드려 물을 마시곤 할 정도였기에 가재나 다슬기같은 맑은 물에만 사는 녀석들도 참 많았었는데, 용소에서 송어양식장이 생기면서 물이 오염되어 지금은 물고기나 가재, 다슬기 같은 놈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동대천이 흘러 들어가는 용진강은 남한강의 한 자락으로 영월부근에서 만난 동강과 서강이 합쳐져서 태화산 자락을 감아 돌아 고씨굴 앞을 지난 뒤 각동에서 옥동천(옥동천은 의풍쪽에서 내려오는 물과 옥동에서 만난다)과 합류한다.
이강이 오사리를 지나 용진리 앞으로 유유히 흘러 깎아지른 벼랑에 불타는 단풍이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북벽을 끼고 영춘 읍내를 지나 하류로 하류로 달려 서울까지 가는 것이다.
용진강에는 잉어, 누치, 쏘가리같은 큰 물고기부터 꺽지, 퉁바우, 모래무지같은 작은 물고기들이 흔했고, 아홉 살이 근처에는 민물조개들도 많았었다.
우리 마을에서 면소재지로 통하는 길은 세 가지인데, 먼저 5일(매월 3일과 8일에 선다)마다 서는 영춘장을 보러가거나 중학교 다니는 애들이 주로 이용한 밤재라는 꼬불꼬불한 고개를 넘어가는 길은 우리가 중학교 때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도로를 닦을 때까지는 겨우 두 사람 정도가 부딪치지 않고 통과할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밤재가 시작되는 곳은 일제 때 만든 콘크리트 다리에서 출발하는데 다리 이름이 동대교이다. 나는 어릴 때 용진리에 속하는 우리 동네 앞에 동대교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이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용진과 동대리의 행정구역상 경계는 사실상 동대천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여튼 동대교에서 출발하여 길가에 오래된 산수유 나무가 많았던 길을 올라가면 머리 위로 신기할 정도로 고양이 모양을 꼭 닮은 고냉이 바위가 있고 험한 벼랑을 왼쪽으로 끼고 올라서면 일단 누구나 한 박자 쉬고 가는 오래된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그 곳에서 내려다 보면 용진과 동대리가 한 눈에 보인다.
그 다음에 발걸음을 재촉하여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에 오래된 느티나무(그 옆이 우리 밭이라서 정확하게 기억한다.) 한 그루을 지나면 거의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가야 하는 아주 비탈진 길이 있었다. 그 곳을 올라서면 바로 용진 쪽에서 아홉 살이 아흔아홉번 꾸불거리고 올라오는 길과 만나고 이곳이 바로 밤재의 정상이다.
정상에는 바윗돌로 둘러싸인 오래된 산수유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요즈음 차타고 지나가면서 보면 성장을 멈추었는지 예전의 크기 그대로더라.
그곳에서 한숨을 돌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돌로 만든 계단을 지나면 이제부터는 한달음에 뛰어갈 수 있는 내리막길이다. 오른쪽으로 내려다보면 아득하게 느껴지는 북벽을 끼고 내려가면 면사무소 옆을 지나는 좁은 길과 만나고 이 길을 지나쳐 곧바로 가면 오른쪽으로 바로 팔용사 묘가 보인다. 이곳을 통과하면 눈앞에 영춘 읍내의 오밀조밀한 그림이 펼쳐진다.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양쪽으로 사과과수원을 낀 영춘향교의 고풍스런 모습이 멋스러운데 여기부터가 영춘면 소재지이다.
영춘으로 가는 길은 이 길 이외에도 용진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느티를 통과하여 다시 한번 나룻배를 타면 영춘중학교가 바로 코앞에 보이는 길이 있으며, 일제 때 닦아놓은 국민학교 뒤쪽의 신작로를 통하여 차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영월쪽으로 빠지기 위해서는 용진나루 상류쪽에 나루터가 있는데 나룻배를 건넌 후 걷거나 쬐끄만 마이크로버스를 이용하여야 했으며, 영주나 풍기 쪽으로 가는 길은 베틀재를 넘거나 거무실 쪽의 산파차가 다니는 길로 가는 방법이 있는데 워낙 멀었기에 먹을 것을 짊어지고 다녀야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키워주던 고향산천, 친구들과 함께 다시 가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고향과 친구들 생각이 날 때마다 머릿 속에 문득 떠오르는 노래 하나를 적어본다.
그리운 언덕 강소천 작사 / 정세문 작곡
1. 내 고향 가고 싶다 그리운 언덕
동무들과 함께 올라 뛰놀던 언덕
오늘도 그 동무들 언덕에 올라
메아리 부르겠지 나를 찾겠지
2. 내 고향 언제 가나 그리운 언덕
옛 동무들 보고 싶다 뛰놀던 언덕
오늘도 흰 구름은 산을 넘는데
메아리 불러본다 나만 혼자서
'✒️ 긴 생각 짧은 글 > 3. 나의 살던 고향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살던 고향은 - 4. 고향의 개천과 강에서 자주 보던 물고기들 (0) | 2008.09.04 |
---|---|
어릴 적 기억 - 2. 재미있는 놀거리들 (0) | 2008.09.04 |
어릴 적 기억 - 1. 재미있는 놀거리들 (0) | 2008.09.04 |
나의 살던 고향은 - 3. 전설따라 삼천리 (0) | 2008.09.04 |
나의 살던 고향은 - 2. 하늘에서 내려다 본 내 고향 모습 (0) | 2008.09.04 |
정겨운 고향 사투리(4) - 충북 단양군 영춘면 (0) | 2008.09.04 |
정겨운 고향 사투리(3) - 충북 단양군 영춘면 (0) | 2008.09.04 |
정겨운 고향 사투리(2) - 충북 단양군 영춘면 (4) | 2008.09.04 |
정겨운 고향 사투리(1) - 충북 단양군 영춘면 (2) | 2008.09.04 |
국민학교 - 13. 졸업식과 그 외의 행사들 (0) | 2008.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