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생활의 또 한가지 즐거움은 봄과 가을에 실시하는 소풍이었지.
우리는 주로 골안과 용진강으로 소풍을 갔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서서 노래를 부르며 소풍을 떠나면 동대리 조금 위쪽에 있는 용소마을과의 경계역할을 하는 느티나무 많은 지역에서 한번 쉬고 경선이네 방앗간을 지나 우측 길로 접어들어 산뱅이를 지나면 거무실이 나오지.
거무실에서는 개울가를 건너기 전에 사당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서 한번 더 쉬고나서 김석희네 집을 왼쪽으로 두고 조금 더 올라가면 골안이고, 골안에 살던 미향이네 집을 지나 약간만 올라가면 앞뒤로 높은 산과 커다란 바위가 듬성듬성 있는 개울가가 우리의 소풍터였지.
소풍장소에 도착하여 오전에는 각 학년끼리 모여서 단체로 노래를 부르며 놀았는데 가끔은 다른 반이랑 누가 크게, 잘 부르나 시합을 하기도 하였는데 6학년 때 5학년 애들이랑 같이 모여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때 그애들이 이상한 외국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다.
하여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우리 노래소리가 컸었는지 메아리가 더 컸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음은 즐거운 점심시간. 주로 김밥을 싸가지고 와서 옹기종기 점심을 먹었는데 주로 음료수는 사이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어릴 적에는 주로 누나들이 도시락을 날라와서는 동네 애들이랑 같이 둘러 앉아 점심을 먹었던 것 같다.
우리가 점심식사를 하기 전에 선생님께 짜웅(?)을 하기도 했었지. 사실 다른 학년 반장들은 선생님 도시락을 싸오기도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럴 형편은 못되었고 아마 선생님께 담배 한 갑(한 보루가 아님.)을 드렸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가장 비쌌던 금색으로 빛나는 청자 담배였었지.
우리가 점심을 먹는 동안에 일찍 식사를 끝내신 선생님은 쬐끄만 쪽지에 선생님 도장이 가운데 찍힌 보물을 숨기러 가셨지. 눈치 빠른 애들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선생님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어디쯤에 감추었는지를 봐 두곤 했었단다.
드디어 점심시간이 끝나고 선생님이 호각을 불러서 아이들을 불러 모으면 곧바로 보물찾기 시간. 가재 잡듯이 돌멩이를 뒤지거나 나무뿌리 사이를 찾아보면 선생님께서 숨기신 쪽지를 찾을 수 있었고, 여러 장 찾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기도 했었지.
그런데 보물을 찾아서 상품을 타기에는 험난한 고비 하나를 더 넘겨야 했으니 바로 노래자랑. 우리 모두는 먼저 나와 노래 부르기를 무척 두려워했었잖아. 그런데 고맙게도 우리 반의 인기스타 성렬이가 항상 먼저 물꼬를 터 주곤 했던 기억이 있다.
나두 노래를 불렀었는지는 기억에 희미하지만 제발 시키지 않았으면 하고 뒤로 숨었다가 반장이라는 체면 때문에 떨며 노래를 불렀던 것도 같다.
학년별 노래자랑이 끝나면 모두 함께 모여서 조금만 잘못 다루면 ‘삐~~~~’하는 소리가 귀청을 뚫어 버릴 듯 울리곤 하던 메가폰을 통하여 교장선생님의 한바탕 훈시를 듣고 나면 다음은 단체 장기자랑시간이었는데, 역시나 학년별 노래자랑과 마찬가지로 별로 마음이 편치 않은 시간이었단다.
이럭저럭 소풍이 끝나면 이제는 선생님들의 통제없이 각자 패거리를 지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었지. 골안으로 소풍가는 날이면 나는 바짓가랑이를 둥둥 걷고서 한길이 아닌 개울가를 따라 물장난을 치며 내려와서는 용수말 사는 애들과 어울려 그곳의 고모네 집에서 자고 다음날 집에 가곤 했었단다.
또 다른 인기장소는 용진강이었지. 주로 오사리 쪽으로 많이 갔었는데 그 당시에는 강에 모래도 많았고 자갈도 참 깨끗했었지. 소풍행사는 어차피 그게 그거였지만 소풍이 끝나고 돌아도는 길은 강을 따라 걸어오면서 강가 얕은 곳에 돌멩이로 깡을 주어 물고기를 잡는 재미가 쏠쏠했단다.
주로 많이 잡히는 물고기는 둔하게 생긴 모래무지와 퉁바우라는 놈이었는데 이 녀석은 아가미 끝에 날카로운 비늘이 달려 있어서 잘못 다루면 면도칼로 벤 듯이 손가락 끝에 피가 나곤 했지.
영월 쪽에서 내려와 각동을 지나 오사리를 거쳐 아홉 살이 쪽으로 굽이쳐 가던 용진강에는 강 양쪽에 매어둔 굵은 철사줄을 이용하여 나룻배를 움직였는데 밤재 고개가 워낙 넘어 다니기 힘들어서 한 때는 영춘 읍내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었지. 강물이 불어나면 삿대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던 기억도 새롭다.
배삯은 연말에 곡식으로 갚곤 했었던 일 기억나는데 나중에는 헌해네가 그 배를 운용했었던가?
아홉 살이 옆에는 밤재로 올라가는 꼬부랑 길이 있었는데 정확하게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아흔 아홉 번은 족히 될 만큼 심하게 꼬불거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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