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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생각 짧은 글/3. 나의 살던 고향은

국민학교 - 11.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by 무딘펜 bluntpen 2008. 9. 3.

우리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막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어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던 무렵이었고, 또한 유신체제가 막 출범하여 반공교육에 어느 때보다도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지.

앞에서도 운동회 때 사용하던 멸공, 통일하는 구호에 대해 얘기했지만 사실 그 이전에는 반공, 통일 이었다가 그것이 승공, 통일로 바뀌었고, 육영수여사 서거 이후에 멸공, 통일이 생겨났던 것 같다.

미술시간이면 가끔씩 반공에 관한 표어나 포스터를 그리곤 했었는데, 바른생활 책에도 뿔 달린 빨간 간첩 그림이 나왔었지. 사실 그 내용은 간첩은 우리와 똑 같이 생긴 사람이고 뿔달린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반드시 책을 지은 사람의 의도대로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애.

그 당시에 앞쪽 두개 건물 사이 - 화장실 가는 통로 -에는 드럼통을 잘라서 빨간 색을 칠해 놓고 그 안에 물과 모래를 넣어 둔 방화사와 방화수가 있었고 그 위 쪽 벽에는 간첩을 신고하면 백만원 상금탄다.라는 표어가 커다란 글씨로 씌여져서 붙어 있었단다. 백만원이 그 당시에는 정말 큰 액수로 보였었는데...

그리고 남자 애들은 토끼풀 뜯으러 가서 가끔씩 삐라를 주워 오곤 했는데 그것을 교무실에 가져다주면 노트나 연필을 상으로 주곤 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가끔씩 반공관련 글짓기나 표어, 포스터 대회, 웅변대회 등도 있어서 입상을 하게 되면 아침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께 상을 받기도 했어.

그 때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한 달에 한번 정도씩 한결같이 국군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위문편지를 쓰곤 했던 일도 기억나니? 대부분 답장이 오질 않았을텐데 나는 가끔은 답장을 해주는 분도 계셨단다.

답장을 받아내는 요령은 의외로 간단한데 편지 내용에다 우리 누나들 -나는 누나가 셋이나 되거든- 얘기를 섞어서 쓰는 거란다. 그렇게 해서 여러 편 답장을 받았는데, 누군가 멀리에 있는 사람이 내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점에서 답장을 받는 당시에는 몹시 기분이 좋았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다시 편지를 쓰지 못했기에 책상서랍 속에 넣어둔 그 답장을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곤 했었다.

반공교육과 관련하여 또 생각나는 것은 반공영화 상영이다. 영화를 상영할 때면 온 동네사람들이 저녁밥을 일찌감치 먹고는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몰려들었지.

운동장 복판에는 커다란 천막이 쳐져 있고 전기가 늦게 들어왔던 우리 시골 사정상 운동장 한켠에 커다란 발동기를 돌려서 전깃불을 환하게 밝히고는 갑돌이와 갑순이 같은 연극을 보여주기도 하고 오제도 검사가 간첩을 때려잡는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었지.

그 당시에는 오검사도 멋져 보였지만 내 눈에는 발전기를 통하여 켜놓은 전기불의 휘황찬란함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말똥바우처럼 집이 먼 애들은 학교 끝난 후 집에 안가고 기다리다 영화를 보고나서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쬐끄만 군용후레쉬(ㄱ자로 꺾여서 건전지 두개 들어가는 것. 나중에 랜턴이라고 6볼트짜리 큰 건전지를 넣은 것을 많이 사용했지만)나 그것이 없으면 볏짚단에다 불을 붙여 길을 밝히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어.

반공교육과 관련하여 그 당시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 중의 하나가 '113 수사본부'라는 책이었는데, 그 내용을 읽고 나도 나중에 경찰이나 검찰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단다.


학교마다 육성회라는 것이 있었지. 그 전에는 사친회라고도 했는데 유학열이라는 동대리 사시는 분이 거의 장기집권을 했었지. 매년 삼일절이면 그 분이 교단 위에 올라가 만세 삼창을 하시던 기억이 있다.

그 육성회 운영을 위해서 학기별로 육성회비를 내곤 했다. 얼마씩 내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파란색 100원짜리 지폐를 냈던 기억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적은 돈은 아니었을 걸. 형제가 여럿이던 우리 집에서는 그 돈을 내려고 아버지가 다른 집에 돈을 꾸러 가시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가 국민학교 입학하던 그해에 만원짜리 지폐가 발행되기 시작하였다는 것 알고 있니? 당시에 우리 마을에서는 담배농사를 많이 지었었지. 가을철에 담배 수납이 끝나고 나면, 엽연초생산조합에서 지급하는 다발돈을 찾아와서 당시 마을 총대을 맡고 계시던 우리 아버님께서 돈을 나눠 주셨단다.

그 때 만원짜리지폐를 처음 보았는데, 하여튼 만원짜리와 천원짜리, 오백원짜리, 백원짜리 지폐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고 이렇게 세상에 돈이 많은데 왜 우리는 요로꼬롬 가난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단다.

그 외에 학교에 가지고 가야 했던 것이 가끔씩 난로용 땔감으로 쓸 장작개비나 자연보호라는 명목으로 밭가에 날리는 흙이 잔뜩 묻은 비닐을 주워서 가지고 갔던 기억도 있다.

하여튼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으니... 우리의 국민학교생활도 재미있는 기억들을 안고 어느덧 흘러가고 말았구나.

오늘 저녁에는 작은 딸애의 학원에서 피아노 연주회가 있다고 같이 가자고 난리다. 샤워하고 준비해야겠다.

휴가 중이라 다른 일들을 신경 안쓰니까 어린시절 얘기를 기억해서 쓰기에 좋구나. 연주회 다녀와서 늦더라도 오늘은 한편을 더 쓰고 잘까 한다. 그렇게 하면 휴가 중에 10탄까지 쓸 수 있겠지. 그런데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쓸지 좀 고민이 된다. 조금 더 생각을 해 봐야겠다.

좋은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