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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생각 짧은 글/3. 나의 살던 고향은

어릴 적 기억 - 1. 재미있는 놀거리들

by 무딘펜 bluntpen 2008. 9. 4.

 아주 아주 어린 시절,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이라는 것은 명확한 것이 별로 없다. 통기타를 잘 치던 큰 누님이 기타를 치며 가요를 부르던 것을 툇마루에 앉아서 듣던 것이며, 오사리에 사시던 당숙댁에 가기 위해 용진강 윗쪽에 있는 무릅이 후둘거릴 만큼 깎아지른 벼랑을 지나가서는 나룻배를 타고 가던 일 등이 기억나고...

 역시 후각의 기억이 오래간다는 말처럼 겨울철에 담배조리를 하던 사랑방에서 느끼던 독한 담배 냄새와 왕겨를 태워 피운 모깃불의 매캐한 냄새 등이 국민학교 가기 전에 내 뇌리에 박혀 있는 기억들이다.

 우리의 국민학교 시절은 학교생활이 절반이라면 집에서 돌아와 책보를 마루에 팽개치고 달려나가 놀기에 바빴던 일이 또 반이었지.

 먼저 국민학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기억에 나는 일은 여자 애들이 고무줄 놀이를 할 때 그 줄을 끊고 도망가기였지. 고무줄 놀이할 때 주로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가자...'하는 노래가 생각나는데 그 노래에 맞추어 팔짝팔짝 뛰면서 고무줄 놀이를 하는 여자애들 곁을 슬며시 지나가다가 재빨리 다가가서 연필깎는 칼을 이용하여 고무줄을 끊고는 도망가곤 했었지.

 나도 그 장난에 동참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줄을 끊고 도망가는 남자애들을 곽영숙이 끝까지 쫓아와서는 붙잡아 놓고 혼내주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난다.

 우리가 주로 즐기던 놀이는 뭐니뭐니해도 공차기였는데 사실 저학년 때는 운동장이 우리 차지가 되지 못하였기에 주로 쉬는 시간이면 운동장 가의 그네나 미끄럼틀, 시소를 타거나 철봉에 매달려서 서로 다리를 벌려 상대편의 몸을 감아 떨어뜨리는 장난을 하며 보내곤 했었어.

 그러나 고학년이 되면서는 드디어 운동장을 장악하여 축구를 자주 했는데, 당시에 제대로 된 축구공을 차본 적은 별로 없고 바람빠진 공이나 아니면 배구공을 차고 놀기도 했었지. 물론 축구화를 신고 뛴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용구, 광오, 준희와 황정하가 축구를 잘했고 종진이나 춘선이의 똥볼도 무시할 수 없었지. 11명씩 축구를 한 적을 별로 없고 참가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짝을 맞추어 들어오기만 하면 되는 시합이었지만 왜 그리 재미 있었는지... 당시에 인기있는 축구선수였던 차범근이나 김진국같은 선수들처럼 되고 싶은 꿈들을 안고 해질녘까지도 공을 차곤 했지.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의 축구였지만 5학년인가 6학년 무렵에는  영춘국민학교 애들과 시합을 한 적도 있었는데 나중에 같이 중학교를 다녔던 노병남, 김태호, 최동욱 같은 애들이 왔었던 것으로 기억은 나지만 승부에 대한 기억은 없어. 다만 중학교 들어가서도 서로 승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던 것을 보아서 무승부로 끝나지 않았을까 짐작만 하고 있다.

 하긴 학교에서의 축구는 이름만이라도 공을 찼었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것도 형편이 안되었기에 넓은 논바닥에서 쬐끄만 정구공을 차거나 짚을 돌돌 말아서 공대신 사용하기도 했지.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동네에서 돼지를 잡는 날이면 김이 모락모락나는 돼지 오줌보를 차는 일이었지.

 다음은 학교 다녀와서 하는 놀이 중에 요즘같은 겨울철에 하는 놀이들을 생각해 볼까.

 먼저 얼음지치기는 빼놓을 수 없는 종목이지. 동네마다 한 두개씩 냇물을 논바닥으로 끌어들여서 꽁꽁얼리면 자연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졌지. 그 주변의 논둑은 다 망가지긴 했지만 논주인이나 주변 사람들 아무도 야단치거나 혼내진 않았었지.

 얼음지치는 도구는 주로 스케또라고 불리는 것이었는데 사과궤짝의 판자를 떼어내서 사각형 판을 만들고 그 밑에 두 개의 발을 댄 후에 거기에 굵은 철사로 살을 대면 훌륭한 놀이감이 생겼지. 거기에다 나무작대기에 못을 박고 뾰족하게 끝을 갈아서 송곳을 두개 만들면 준비 끝.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타기도 하고 쪼그리고 앉아서 타기도 했는데 이것이 가장 안전하고 초보자용으로 어울리는 것이었는데, 나중에는 철사대신에 철물점에서 사온 쇠로 된 날을 달기도 했었지.

 중급자나 고급자용 스케토는 조금 크기가 작고 외날로 된 것이었는데 송곳은 한개의 길다란 장대를 이용하여 서서 타는 것이었는데 나는 균형감각이 없어서인지 잘 타지는 못했었단다.

 가장 만들기 편하고 조잡한 것은 역시 비료포대를 타는 것이었지. 이건 혼자서 타기는 어렵고 앞에다 새끼줄을 끈을 만들어 누군가 끌어주어야 했었지. 물론 비료포대는 얼음 위에서 지치는 것 보다는 경사가 약간 진 언덕에 싸인 눈위에서 타야 제 맛이긴 했었지만...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강물이 별로 오염이 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더 날씨가 추워서였는지는 몰라도 강물이 꽁꽁 어는 적이 많았었는데 그래서 강가에서 썰매를 타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얼음지치기는 빨리달리기 시합, 술래를 정해놓고 붙잡기 놀이, 서로 부딪치며 썰매에서 떨어뜨리기 등을 하기도 했지. 그리고 얼음판 옆에는 항상 볏짚으로 불을 놓고는 추위에 지친 손을 쬐거나 얼음구멍에 빠진 발을 말리기도 했었지.

 다음은 연날리기인데 주로 만들기 쉬운 방패연과 가오리연을 많이 만들었어. 문종이를 잘라서 모양을 만들고 망가진 비닐우산이나 못자리할 때 쓰던 대나무를 이용하여 살을 만들었지. 2-3미터되는 긴 꼬리로 장식을 하고 나면 연은 완성.

 사실 만들기 더 까다로운 것은 얼레인데 간단하게 사각형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나무를 정성껏 깎아서 육각형으로 만드는 작업은 며칠이 걸리곤 했어. 그 얼레에다 어머님을 졸라 한 두 차례 풀을 먹인 실을 감아서 연에 매달고는 바람 적당히 부는 언덕 위에서 연을 날리곤 했었지.

 연을 높이 날리거나 연싸움 등을 하면서 놀았는데, 연싸움을 위해서는 사기나 병을 깨어서 가루를 만들어 실에 풀먹일 때 섞으면 무적의 싸움연이 되곤 했지. 나는 주로 필라멘트가 끊어진 백열전구를 깨서 곱게 빻은 후 사용하곤 했었단다. 하여튼 연싸움 끝에 진 연은 주인의 안타까움을 멀리로 하고는 형제봉 꼭대기를 향해 날아가곤 했었지.

 연날리기의 또 하나의 적은 곳곳에 거미줄처럼 널린 전기줄이었는데 까딱하면 거기에 휘감겨 연을 끊어 먹기 일쑤였고 결국 겨울철이 지나고 나면 전기줄마다 상흔처럼 연이 걸려 있고 했었지.

 귀를 떼어갈 듯이 추운 겨울철 놀이의 백미 중에 하나는 불장난이었지. 당시에는 지금처럼 편리한 일회용 라이터는 없었으니 조양표 성냥이나 커다란 곽성냥을 이용하여 불을 피우곤 했는데 특히 인기있는 것은 아무 데나 그어대면 불이 붙는 닥성냥이었지.

 논둑이나 개울가에서 나무나 마른 풀을 모아놓고 불장난을 하며 고구마나 근처에서 잡은 물고기, 개구리 등을 구워먹기도 하고, 개울가에서 돌로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얼기설기 얹은 집을 지어놓고 온돌바닥을 만든 후에 아궁이까지 만들어 불을 피우는 소꼽놀이를 하기도 했었지. 특히 봄날 무렵이면 쥐불놀이를 한다고 남의 집 볏가리를 홀라당 태워먹고는 부모님들께 혼나기도 했었지.

 하지만 역시 불놀이는 깡통 돌리기가 제일이지. 깡통돌리기는 대보름 즈음에 주로 했는데 빈 통조림 깡통에 못으로 숭숭 구멍을 뚫고 철사로 손잡이를 길게 만든 후에 그 안에 바짝 마른 참숯을 집어넣고 해가 진 후에 휘휘 돌려대면 다다닥 소리를 내면서 불똥이 튀는 모습이 요즘 화약으로 하는 불꽃놀이보다도 훨씬 황홀하고 멋진 광경을 보여주곤 했지.

 물론 이런 불놀이나 특히 깡통돌리기를 하고 난 다음날이면 두껍게 껴입은 잠바마다 불똥이 튀어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기에 어머님께 혼도 많이 났지.

 가끔 민생고 해결과도 연결이 되었기에 놀이라고만 하기에는 좀 뭣하지만 토끼나 꿩 또는 참새를 잡는 것도 재미있었다.

 토끼잡기는 가느다란 철사를 살짝 불에 구어서 동그랗게 덫(우리는 '옥로'라고 불렀는데 무슨 뜻인지는 잘 몰라)을 만든 후에 산위로 올라가 동그란 토끼똥이 많이 흩어져 있는 토끼가 잘 다니는 길을 우선 찾아야지. 그리고 나면 그 주변에 나무를 휘거나 잘라와서 옆이나 위쪽에 덫을 매달고 주변에 갈입이나 솔잎 등으로 위장을 하면 이제 준비는 되었다.

 그러나 사실 토끼잡이의 가장 중요한 점은 부지런함이야. 아침 일찍 일어나 높은 산 위로 올라가서는 자기가 놓은 덫을 점검하여 토끼가 걸렸으면 걷어와야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 내가 늦게 가면 어떤 얌체가 내 덫에 걸린 토끼를 가져가는 경우도 많았거든.

 나는 사냥에 별 소질이 없었는지 5학년 때였던가 100개 정도를 앞 산에 놓았었는데 겨울 내내 겨우 토끼 한 마리의 수확에 만족해야 했고, 천성이 게을러서 매일 사냥터로 출근하지도 못했었던 것 같다.

 꿩잡기는 콩에다 송곳으로 구멍을 파서 그 안에 독극물(싸이나라고 하얀 약을 주로 사용했었지)을 집어 넣고 입구를 촛농으로 봉한 것이거나 아니면 수수를 살충제에 불린 것을 사용했단다. 눈이 내리고 나면 꿩이 올만한 장소를 살짝 눈을 쓸어 낸 후에 그것을 뿌려 두는 것이지.

 이 일의 문제는 독극물을 먹은 꿩이 그 자리에서 죽지 않는다는 점이지. 맛있게 시식한 후 속이 안 좋은 이 녀석들이 500미터나 심지어 몇 킬로미터를 날아가서 덤불속에서 괴로워하면서 죽어가는 경우가 많아서 다른 사람 좋은 일만 시키는 경우가 많았지.

 참새덫은 물푸레 나무를 동그랗게 휘어서 거기에 닥나무 껍질을 벗겨 꼬은 가는 줄로 얼키설키 마치 테니스 라켓처럼 덫을 만들었지. 그리고 나서 볏짚위에 새끼를 비틀어 꼬고 그곳에 이 덫을 설치한 후 참새가 거기에 달린 곡식(주로 조나 기장)을 건드리면 덫이 탁 소리를 내며 덮치도록 만든 것이었지.

 겨울철 포장마차에서 가끔 참새구이를 먹으면서 이 참새를 어떻게 잡혔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단다. 

 겨울철의 특별한 먹거리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개구리 잡기이지. 우리 마을에서는 이 식용개구리를 깨구락지라고 불렀는데, 추운 겨울철에 얼음을 깨치고 차가운 바윗돌을 제끼면 등은 검고 배는 희거나 약간 검붉은 식용 개구리가  몸을 웅크리고 있지. 손을 쑥 집어넣어 움키면 미끈한 이놈을 도망가려 몸부림을 치는데 얼른 바윗돌에 (약간 잔인한 장면이지만) 힘껏 메어치면 몸을 바르르 떨면서 뻗었지.

 개구리는 역시 숯불에 구어서 굵은 소금에 찍어 먹어야 제맛인데, 뒷다리가 오동통하고 특히 맛있긴 하지만 몸통도 약간 쌉쌀한 것이 제법 맛있었는데...

 요즘은 개천물이 오염도 많이 되고, 이런 것들이 보양식이라고 해서 각광을 받는 바람에 아마 우리 동네의 개울가에도 겨울철이면 개구리 보기가 힘들거야.

 자치기는 여름철에도 하긴 했지만 겨울철에 주로 하던 놀이였지. 가을걷이가 끝나야 놀이장소가 넓어지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말야. 자치기는 일단 한 뼘정도의 엄지손가락 굵기의 나무에다 양쪽을 쐐기 모양으로 깎아내는 것이지. 그리고는 팔둑 길이만한 방망이를 가지고 쐐기를 치는 방식으로 놀이를 하는 것이지.

 먼저 땅에다 지름 한뼘 정도 되는 원을 긁고 너댓 발자욱 떨어진 곳에서 그 곳에 쐐기를 던지는 거지. 원 속에 들어가면 아웃, 3분의 1만 들어가면 두번, 3분의 2가 들어가면 1번, 그리고 원 바깥에 위치하면 세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지.

 방망이를 거머쥐고 쐐기를 깎인 부분을 내려치면 쐐기가 공중에 뜨는 순간에 냅다 갈겨서 멀리 날려 보내는 놀이지. 날려보낸 거리가 쐐기길이의 10배 이하일 때는 아웃이고, 그 다음부터는 쐐기길이당 1점씩인데공중에서 방망이로 쐐기를 한번 더 드리블 할 때마다 점수는 두배로 늘어나는 것이지.

 재미있는 것은 날려보낸 거리를 내가 어림짐작으로 부르고 상대가 이의없으면 그대로 인정하되, 이의를 제기할 경우는 실제로 거리를 재어보아 너무 과하게 부른 것이 들통나면 아웃!!!

 이 이외에도 겨울철이면 구슬치기나 비석치기같은 놀이를 했었는데, 나머지와 여름철 놀이는 다음 기회에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