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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독서생활

서평] <숨결이 바람될 때> 폴 칼라니티 저, 흐름출판

by 무딘펜 2020. 5. 29.

"서른 여섯살 의사의 진솔한 마지막 고백록"

 

 

1.
전도 유망한 신경외과 레지던트였던 저자는 자신이 주로 치료해 왔던 바로 그 병, 암에 걸려서 서른 여섯의 젋은 나이에 아내와 돌이 채 지나지 않은 딸을 남겨두고 죽는다.

이 책은 그가 죽음과 대면하면서 마지막으로 세상과 특히 그의 어린 딸에게 남긴 글이다. 왜 이 책을 남겼을까?

"중병에 걸리면 삶의 윤곽이 아주 분명해진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만 하면 앞으로 할 일은 명백해진다. 만약 석 달이 남았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1년이라면 책을 쓸 것이다. 10년이라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다.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진리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하루를 가지고 난 대체 뭘 해야 할까?"(p.193에서 일부)

그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는 - 발병한 지 22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하는데 - 암과 꿋꿋하게 싸워가면서도 삶과 죽음, 생명과 도덕에 관련하여 본인의 생각을 이 책으로 남겼다. 출판은 의사이며 그의 아내인 루시가 마무리하였다.

2. 의사로서의 폴

꽤 오래 전에 흥미롭게 보았던 드라마 <푸른 거탑>에서 의사들의 삶의 일면을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의사들, 특히 신경외과의사들의 생각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신체를 물질이자 구조로 보는 것과 인간의 극심한 고통을 줄이는 일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p.73)

인간을 감정과 이성이 깃들어 있는 인격체로 대하는 것은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인 도리로 여겨진다. 그러나 의사들이 사람(의 신체)을 물질로 보지 않는다면 어찌 다른 사람의 살아있는 몸에 아무런 가책없이 시퍼런 메스를 서슴없이 그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좋게 말하면 냉정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자비하게 인간의 몸을 고장난 물건처럼 다룰 수 있는 직업적 훈련에 숙달되지 않았다면 환자들의 고통은 결코 줄어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냉철함만이 의사의 자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메스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면 외과의가 선택할 수 있는 도구는 따뜻한 말 뿐이다."(p.112)

수술 결과와 상관없이 메스 이외에도 환자의 상황과 심리에 대한 이해심과 따뜻한 말이 얼마나 소중한 지는 병원에 며칠 간이라도 입원해 본 사람은 절대적으로 공감할 것이다.

3. 환자로서의 폴

저자는 유능한 의사였던 자신이 환자가 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삶의 과도기를 잘 넘기도록 도와주는 목자의 자격을 반납하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이 되었다."(p.148)

그리고 신체의 건강함이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 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뇌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그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신체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다."(p.165)

특히 환자가 되는 상황을 '신용카드 분실'에 비유한 다음 문장은 심하게 아파본 일이 없는 나에게도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절묘하게 표현되었다.

"중병을 앓으면서 겪게 되는 종잡을 수 없는 건 가치관이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이다. 환자가 되면 자신에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려고 계속 애를 쓰게 된다. 누군가가 내 신용카드를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자금 계획 세우는 법을 배워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과 비슷하다."(p.192)

우리는 평상시에 신용카드를 사용하면서 그 잔액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런 계획없이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충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만약 신용카드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이고, 앞으로 얼마를 벌 수 있을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그 범위 내에서 지출계획을 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건강하고 인생이 잘 풀릴 때는 영원히 별 걱정없이 살 수 있을 것처럼 시간의 소중함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병에 걸리고 나면 특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 남은 기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4. 읽고 나서

폴은 스탠포드대에서 영문학 학사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의 말대로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나게 한 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 신경외과 의사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문장의 흐름이 유려하고 표현이 깊이가 있다. 이종인씨의 번역도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럽다.

읽는 내내 내가 이런 상황에 몰린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고민해 보았다. 아니 사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죽음은 내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 오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나는 지금까지 과연 무엇을 해 왔는가? 앞으로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이며, 할 수 있을 것인가?

좋은 책은 답을 제시하려 하기 보다 올바른 질문을 던져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