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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짧은 생각들

[펌] 꿈, 현실 그리고 유우머(배명복 논설위원)

by 무딘펜 2016. 12. 30.

2008년 중앙일보이 배명복 논설위원이 쓴 "꿈, 현실 그리고 유머"라는 논설입니다. 오래된 내용이지만 혼자보기 아까워 올립니다.



  또 한 해가 저뭅니다. 사흘 후면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2006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황금돼지의 해'라는 정해(丁亥)년 새해가 밝아옵니다. 묵은 한 해를 정리할 시간입니다.


  돌이켜 보니 어떻습니까. 그만하면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실망스럽습니까. 뿌듯한 마음으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분들보다는 아무래도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대단한 목표를 세웠던 건 아닙니다. 욕심이 크면 후회도 크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금연, 헬스클럽 다니기, 절주(節酒), 딸아이와 매일 10분씩 마주 보고 대화하기, 부부싸움에서 져주기, 혼자 사는 노모께 일주일에 한 번 전화하기…. 대부분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에 관한 작은 결심들이었습니다. 자신과의 사소한 약속조차 제대로 못 지킨 저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가뭇한 옛날에 읽었던 린위탕(林語堂)의 '생활의 발견'을 얼마 전 다시 읽었습니다.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12월 마지막 날, 연초에 결심했던 것들을 되돌아 보며'30%쯤 달성했군'하며 아쉬워하는 데 있다." 완벽하지 못한 것이 인간이고, 그래서 인간은 아름답다는 겁니다. 위안이 됩니다.


  이 책에서 린위탕은 흥미로운 공식을 제시합니다. "R-D=짐승, R+D=이상주의, R+H=현실주의, R+D+H=지혜"라는 공식입니다. R은 현실(reality), D는 꿈(dream), H는 유머(humor)를 뜻합니다. 꿈이 있어서 인간은 짐승과 구별됩니다. 꿈이 없는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R-D는 짐승입니다.


  R+D는 현실과 꿈이 뒤죽박죽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흙을 빚어 원하는 모양을 만들려면 물기가 적당해야 합니다. 물기가 너무 없으면 모양을 빚을 수가 없고, 너무 많으면 진창이 돼 형체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꿈이 지나쳐 아무런 결실이나 성과를 이룰 수 없는 상태가 R+D입니다. 이상주의입니다. 개혁이나 혁명의 요란한 외침만 있지 성취가 없습니다.


  꿈은 현실에 뿌리를 둘 때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꿈을 한 발짝 떨어져서 삐딱하게, 웃으며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바로 유머입니다. 그래서 R+H는 현실주의입니다. 유머라는 완충장치를 통해 꿈을 현실에 접목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이상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R+D+H는 삶의 지혜입니다.


  완벽한 세상이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이 있다면 재미도 없을 겁니다. "신문에는 살인사건 기사가 하나도 안 실리고, 불도 안 나고, 이혼도 없고, 합창단의 처녀와 정을 통하는 목사도 없고, 사랑 때문에 왕위를 포기하는 사람도 없는 사회에서 행복이란 사라진다. … 구경꾼이 이미 우승자를 알고 있는 경마처럼 인생은 재미없을 뿐이다." 린위탕의 말입니다.


  세상에는 연말 보너스로 1억 달러(970억원)를 받는 사람도 있고, 핵실험으로 세상을 놀라게 해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모지에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신기루의 꿈을 좇느라 피곤한 사람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속세의 교황'이 된 신데델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입만 열면 희한한 논리와 어법으로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재미있고, 그래서 살 만한 것 아닐까요.


  지난 한 해 우리 사회는 어땠습니까. 현실을 무시한 채 너무 꿈만 좇아온 건 아닌가요. 유머의 프리즘으로 꿈을 바라보지 않고, 너무 정색하고 핏대를 올렸던 건 아닌가요. 꿈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되 꿈보다는 현실에 무게중심이 가 있는 건강한 사회, 유머가 통하는 너그러운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 아닐까요. 넘어지고, 쓰러져도 웃으며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서로 손을 잡아주는 그런 사회를 그려봅니다. 여러분의 행복한 새해를 기원합니다.  (중앙일보 배명복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