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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의 살던 고향은

[어린시절] 장마와 홍수의 기억

by 무딘펜 2011. 7. 28.




어린 시절 나의 고향집은 소백산 기슭에 있었는데, 집에서 2Km정도 떨어진 곳에 남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은 마을 이름을 따서 용진강이라고 불렸는데, 바로 영월의 동강과 서강이 합쳐져서 약 100리 정도를 흘러내려온 지점에서 나루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었다.

한때는 한강 하류에서 소금을 실은 배들이 이곳에서 소금가마니를 풀고 또 한편으로는 소백산의 아름드리 나무들을 벌목하여 뗏목으로 엮은 다음 한강의 물결따라 서울로 흘러보내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루 진(津)자를 써서 용진...

마을 앞으로는 소백산 깊은 골에서 흘러 내려온 맑은 개천이 흘러 용진강으로 합류하고 있었는데, 평상시는 징검다리로 건너는 얉은 개울이지만 여름 이맘 때 쯤에 조금만 비가 많이 내린다 싶으면 소백산에 내린 빗방물이 모여 모두 이곳으로 흘러 내려 오는 것처럼 물이 순식간에 불어나서 작은 강을 이루곤 했다.

76년 이었던가? 큰 장마가 닥쳐서 마을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그 이후에도 2006년이었던가 또 한번의 커다란 홍수가 나서 매스컴을 탔던 단양군 영춘면 용진리...

장마비의 기운은 용진강 위로 펼쳐진 태화산 위의 구름이나 소백산 형제봉에 걸린 구름에서 감지된다. 평상시의 가벼운 구름이 아닌 시커먼 구름들이 흘러가지 못하고 봉우리에 걸리면서 세상이 온통 어둑어둑해지면 장마의 기운이 온 세상을 덥은 듯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된다.

시골에서는 논밭일을 하다가 우산을 쓰는 경우는 없다. 그냥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맞는다고 해도 옷만 젖을 뿐 별로 건강에 해로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비가 한 반 나절 정도 내리고 나면 이젠 상황이 달라진다. 개울건너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모두 마을로 철수하고 사람들은 손에 손에 삽자루를 들고 논의 물고를 트기에 정신이 없다.

하루정도 쉼없이 비가 내리면 이건 드디어 심각한 사태가 된다. 홍수의 기미가 보이면 사람들은 용진강을 바라다 본다. 사실 소백산에서 내려오는 물들이 많다하지만 용진강을 통해 내려가 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 무서운 것은 용진강이 넘쳐서 치고 올라오는 것이다.

홍수가 시작되면 마을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심각한 얼굴로 두런두런하거나 몇 집은 집안 가재도구들을 챙겨서 언제라도 마을 뒷산으로 피신할 채비를 하는 걸 보고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은 어렴풋한 불안감은 있었지만, 사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 불안감보다는 엄청난 폭발력으로 온 들을 휩쓸고 지나가는 물구경에 마음이 온통 뺏기는 때였다. 더구나 물이 많이 불어나면 학교를 안가도 되기 때문에 개학 중에는 은근히 오늘 비 좀 많이 내렸으면 하고 속으로 빌 때도 있었다.

특히 우리 집은 터가 좀 낮은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집 뒤의 벼랑에서 시원한 샘물이 퐁퐁 솟아서 마을의 식수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비가 오면 집안의 어느 곳이나 물구멍으로 변하곤 했다.

비가 좀 내린다 싶으면 먼저 마당에 마치 여드름 자국이나 개미 구멍처럼 조그만 틈이 벌어지고 상처에 어린애 오줌 줄기처럼 조금씩 물들이 흘러 나온다. 그리고 나서 약간 시간이 지나면 주변의 흙들이 뭉굿 솟아 오르면서 점점 물줄기가 세게 솟아 오르면서 이젠 총각 오줌줄기처럼 변한다.

비가 더욱 퍼붓고 마을 개천도 수위가 올라서 징검다리가 파묻힐 정도가 되면 우리집의 물구멍들도 주변의 흙들을 완전히 들추어내고 마각을 드러낸다. 이젠 완전히 소오줌이며 말오줌 줄기처럼 싯푸런 물줄기를 토해내고 마당은 온통 작은 호수를 이룬다.

부엌은 더욱 심했다. 구들장 아래에 잠복해 있던 물줄기가 터지면서 다른 곳으로 빠지지 못했기에 결국 아궁이는 엄청난 양의 물을 토해내는 배수구의 역할을 하곤 했다.

이렇게 생긴 솟아오른 물들이 집을 섬처럼 만들어 버리면 온 가족은 마루에 모여앉아서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 지 근심어린 표정으로 내리는 빗줄기를 아무 말없이 지켜보고, 아버지와 형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짐을 꾸리거나 물이 좀 더 잘 빠져 나가도록 주변에 배수구를 파느라 정신이 없었고, 어머니는 물에 점령당한 부엌을 포기하고 뒤란의 언덕 위에 작은 간이 솥을 걸고 풀풀 연기나는 젖은 솔가지를 눈물나게 불며 우리 끼니를 준비하곤 하셨다.

나는 방학숙제하라는 성화에 못이겨 책은 펴놓지만 빗줄기와 마당 가득한 황톳빛 물에 마음을 빼앗겨 틈만 나면 눈을 피해 도망나와서 친구들과 물놀이에 빠지곤 했다. 어린시절 물놀이 도구는 단연 고무신이었다. 고무신을 물에 띄우고 그 안에 개미라도 몇 마리 태우곤 살랑살랑 물결에 따라 흘러가는 고무신을 관찰하는 것이 왜 그리 재미있던지...

그러다가 갑자기 빠른 물살에 고무신이 떠내려 가기라도 하면 큰 일이다. 더구나 비가 많이 내려 흙탕물이 생기면 뒤집힌 고무신은 흙탕물에 가려서 찾기도 쉽지 않다. 이런 날은 한쪽에만 고무신을 끼워신고 가족 중 아무 한테도 발각되지 않도록 조용조용 집으로 잠입하지만 댓돌에 놓인 외쪽 고무신을 눈썰미 매서운 어머니가 발견 못할 리가... 그날 저녁은 내내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고 다음날에 발에 맞지도 않는 형의 신발을 끌고 다녀야했다.

홍수가 어느정도 진정되고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면 마을 아이들은 언제 그런 재난이 있었느냐는 듯이 오히려 더 신나는 놀꺼리가 생긴다. 바로 홍수로 인해 불어난 물놀이였다. 

큰 홍수가 지나가면 우리들의 물놀이터도 위치를 옮겨 다닌다. 아직 홍수기운이 남아 약간 잿빛인 물은 제법 위협적인 흐름을 보여주지만 그 물에 못들어가면 다른 아이들에게 겁쟁이 얘기를 들을까봐 어푸어푸 물을 몇 모금 먹더라도 과감히 물속에 뛰어든다.

수영이라도 해봤자 개구리 헤엄이지만 충주비료공장에서 나온 요소비료포대 하나면 물놀이는 시간가는 줄 모르는 놀꺼리였다. 두꺼운 비닐로 만든 비료포대를 꺼꾸로 세워 입구를 물에 대면 그 안에 공기가 갇혀서 빵빵한 튜브역할을 해준다. 그래서 수영을 잘 못하는 애들도 비료포대를 잡고서 신나게 놀곤 했다.

76년도 대홍수가 지난 다음에 집을 잃은 수재민들을 위하여 블럭집을 지어준 적이 있었다. 그 블럭집이 조성된 곳이 바로 '새마을'이라고 불렸는데, 시골의 초가집과는 사뭇 다른 위용을 보여 주었기에 그 집에 사는 것이 마을 애들한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오죽하면 홍수가 날 때마다 우리집은 혹시 떠내려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비가 더 오길 빌었을까?

지금 TV에서 장맛비로 혼통 물난리가 난 장면을 보여주어 한편으로 걱정이 되면서도 나머지 마음은 어느새 고향으로 도망쳐 가서 고무신 배로 물놀이 하던 그 소년이 되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