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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짧은 생각들

[시] 아버지의 나이 - 정호승

by 무딘펜 2013. 1. 29.

내 직장에는 거의 10년의 세월동안 매일 아침에 직원들에게 편지를 쓰시는 상사가 한 분 계시다. 내가 아침마다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컴퓨터를 켜고 바로 이 분의 메일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분의 메일은 틀이 거의 일정한데, 첫머리에는 당일 업무와 관련한 사항, 이어서 우리 조직의 일반적인 이야기들이 나오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읽었던 책에 나온 글귀 중에 소개할 만 한 것들을 적어 주신다.


부서장으로 근무하다가 보직을 이동하실 때마다 그동안 보내 준 메일을 직원들이 책으로 엮어서 선물로 드렸다는데 아마 여덟 권 쯤 되는 것 같다. 나도 4권을 가지고 있다.


이분의 글 솜씨는 훌륭하다. 그런데 나는 이분의 글 중에 다른 점에서도 감동을 받곤하는데, 먼저 본인의 의견을 굳이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읽다보면 자연히 무슨 생각을 하고 이글을 쓰셨는지 알 수 있다. 두번째는 소개해 주시는 글귀들을 보면 독서량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야와 시대를 망라한 독서량에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사실 나는 이분을 내 직장생활을 모범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발뒷꿈치라도 쫒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은 이분이 오늘 아침에 소개해 주신 정호승 시인의 '아버지의 나이'를 읽었다. 내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상을 뜨신 아버님을 생각하며, 한편으로 내 딸들에게 나는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조용히 음미해 본다.


[사진출처 : 늘푸른교회 홈페이지 http://www.evergreen.or.id/eg/new/Bulletin.php?index=160156]





아버지의 나이

 

                                                정 호 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정호승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