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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의 살던 고향은

[추억] 동네 이발소... 그 따스한 공간에 대한 기억

by 무딘펜 2016. 12. 8.

산골동네에서 유일했던 도회적 공간, 이발소. 그곳에 걸린 '이발소 그림'과 빨갛게 피어나던 석탄난로,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유리거울, 양동이에서 가물거리는 수증기가 연출하던 그 따스한 공간이 그립다.


  오랫만에 이발을 하였다. 몇 주 전부터 머리카락이 길어져 신경이 쓰였는데 주말에는 특히나 문 밖으로 단 한 발자욱도 나가기 싫어하는 내 게으른 성격에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에야 드디어 해치웠다.

 

  내가 자주, 아니 사실은 유일하게 가는 이발소는 우리 집에서 한참을 걸어야 한다. 안양천을 건너고 경부선 철도가 위를 가로 지르는 자그마한 굴다리를 지나면 다소 허름한 느낌을 주는 '우리동네 이발소'라는 자그맣고 고풍스런 이발소가 있다. 겉보기에 쉰은 족히 넘었을 듯한 푸근한 인상의 내외분 단 둘이서 꾸려가는 이발소인데, 남편분은 머리를 깎는 일을 맡고 아내분은 손님맞이부터 면도와 머리감겨주는 일을 주로 해준다.

 

  내 집에서 멀지 않은 안양역 근처에 체인점 형식으로 운영하는 몇 군데 깔끔한 이발소가 있긴하지만, 왠지 나는 이 작은 이발소로만 발길이 향한다. 아마도 어린 시절에 자주 갔던 내 고향 산골 동네의 그 허름한 이발소를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출처 : 사진이 있는 양촌재의 행복갤러리

  어린시절 나는 소백산 골짜기에서 자랐다. 강에서 가까운 우리 동네에는 이발소가 업하나 있긴 했지만 우리집은 아랫마을과 윗마을의 경계 쯤에 있었고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가 있던 윗동네가 오히려 맘적으로 가까웠기에 윗동네로 이발하러 다녔다. 그곳에는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던 산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허름하지만 기와지붕에다 시골에서는 보기드문 유리문을 갖춘 이발소가 한군데 있었다. 유리문을 드르륵 소리나게 열고 쭈삣쭈삣 들어가면 정면에 액자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새끼 돼지 몇 마리가 어미 돼지의 젖꼭지에 달라붙어 생존경쟁을 하는 장면과 그 옆에 한자로 '가화만사성'이라고 씌어있는 그야말로 '이발소 그림'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이발소 공간에서 중간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건 바로 석탄난로였다. 무쇠로 만든 둥그런 모양새에 두어 시간마다 석탄과 흙을 물로 개어서 떠얹으면 특유의 석탄가스 냄새를 풍기며 하루종일 화력좋게 타오르는 이발소 재산 1호. 난로 위에는 살짝 찌그러진 양은 바께쓰(양동이라고 써야 맞는다는 건 알지만 난 바께쓰가 좋다.)가 올려져 있고 그 안에는 따뜻한 기운을 풍기는 수증기가 희끄무레하게 솟아 올라 그 안을 푸근하게 덮혀주고 있었다. 정면 벽의 액자 바로 밑에는 시골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게 아주 커다란(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큰) 거울이 있었고 그 때문에 좁은 이발소는 그나마 덜 답답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발소 주인은 윗동네가 고향인 분이었는데 아마도 도회지에 나갔다가 이발기술을 배워가지고 돌아와 이 곳에서 이발소를 차렸다고 들은 것 같다. 수더분한 인상이라 평소에는 우리랑 같은 시골사람이었지만, 이발을 할 때 입는 하얀 가운만 걸치면 갑자기 시골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도회냄새를 풍기는 세련된 스타일로 변신하곤 했다. 점방이라 불리던 구멍가게와 함께 이 이발소가 아마 동네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도 끼니를 꾸려가는 몇 안되는 가구 중의 하나였으리라.

 

  어린 시절에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키가 작아서 이발소 의자의 팔걸이 위에 판자를 하나 올려놓고는 그 위에 앉아서 머리를 깎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먼저 수건을 목주변에 두르고 그 위에 하얀 보자기를 두르는 준비의식을 행하게 된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어린 아이 공통의 팔팔한 성정이 이 시간부터는 자중하고 이발이 끝날 때까지는 열중 쉬어하고 있어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먼저 이발기계로 쓰윽 쓰윽 머리를 대충 밀고, 다음은 가위로 사각사각 정성스레 다듬어준다. 이발기계와 가위가 내는 규칙적인 소리에 신경을 쓰다보면 참으려 해도 어느새 마술처럼 잠이 들어버리곤 했다. 어깨를 툭툭치는 손길에 눈을 뜨면 조금 전의 더벅머리는 어딜가고 거의 까까머리에 가까운 말쑥한 녀석이 거울 속에서 졸린 눈을 간신히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은 면도인데, 비누거품이 묻은 솔을 난로의 연통에 슬쩍 문질러 따뜻하게 한 다음 목덜미와 구렛나루에 묻힌 다음, 가죽에 쓱쓱 문질러 시퍼렇게 날을 세운 면도칼로 머리카락 이외의 솜털들을 깔끔하게 밀어낸다. 혹시라도 실수하거나 면도칼이 잘 안들면 살짝 살갖을 베기도 하는데 그 자리에 핏방울이라도 맺히면 대충 신문지를 찢어서 상처에 붙여준다.

 

  그 다음은 머리감기. 이발소 한쪽에는 시멘트로 만든 네모 반듯한 물저장고가 있었는데, 세수대야에 그 물을 한바가지, 그리고 적당히 난로 위 바께쓰에서 데워진 물 한 바가지를 퍼내어 섞은 다음 머리를 감겨준다. 


  먼저 물을 대강 묻힌 머리칼을 쑥냄새가 풀풀 풍기는 빨래비누로 썩썩 문지르고, 그 다음은 마치 운동화 빨 때 쓰는 것과 같은 플라스틱솔로 머리껍질이 벗겨지도록 문지른다. 아프기도 했지만 지난번 이발 이후에는 한번도 감지 않아 쇠똥이 덕지덕지한 두피에 제법 시원한 감각도 느끼며, 아픔 때문인지 눈에 들어간 비누거품 때문인지 살짝 눈시울이 붉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집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깨끗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까슬까슬한 수건으로 머리를 툭툭 말려주고 털어주고 나면 이발행사는 끝난 것이다.

 

  요즘같은 겨울철이면 깎은 머리에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서둘러 집으로 뛰어오곤 하였다. 사실 아저씨의 이발실력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는지 어떤 때는 삐뚤빼뚤 이상하게 깎은 머리 때문에 친구들의 놀림이 되기도 하였다. 세월이 흘러 내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에 사람들이 읍내로 가기 위해 걸어 다니던 '밤재'라는 이름의 고갯길 위로 큰 길이 뚫리고 시내버스가 동네 앞까지 들어오면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읍내의 이발관을 이용하게 되고, 이후에는 이분의 영업도 끝이 난 것으로 알고 있다. 10년 전 쯤인가 윗동네를 떠나 우리 동네의 빈집을 사서 꾸민 후 그곳에서 혼자 사시는 걸 본 적이 있다.

 

  이제 세월은 많이 흘러 내 머리는 앞머리가 거의 없어진 대머리가 되었지만 어린 시절 그 동네 이발소의 돼지 그림이며, 바께쓰의 수증기와 그 큰 거울이 걸린 그 이발소에 다시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