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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의 살던 고향은

090728 호박에 얽힌 이야기들

by 무딘펜 2009. 7. 28.


호박꽃도 꽃이냐?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냐?

다른 야채(?)에 비해서 호박에 대해서는 이처럼 비하하는 말들이 유난히 많다. 아마도 그 크고 노랗지만 화려해보이지 않는 꽃이랑 펑퍼짐한 늙은 호박의 생김새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알고보면 호박만큼 쓰임새가 많은 것도 없다.

호박이 빠진 된장국을 먹어본 사람은 호박과 된장의 그 절묘한 조화에 대하여 새삼 느낄 것이다. 별로 맛이 특징적이지도 않고 향이 강한 것도 아닌 호박이지만 된장국에 들어가면 이상하리마치 호흡을 척척 맞춰서 우리의 미각을 살살 녹이는 마법을 발휘한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는 호박말랭이가 있다. 여름철 애호박을 얇게 썰어서 햇볕에 며칠간 말린다. 우리 집 같은 경우는 주로 집앞에 있는 개울가의 깨끗한 돌위에 널어서 말렸는데 여름철 따끈따끈한 돌 위에 사나흘만 말리면 바삭바삭한 호박 말랭이가 된다.

그리고 다 말린 호박은 바람이 잘 통하는 자루에 넣어서 광에 소중하게 보관한다. 이것이 진가를 발휘하는 때는 나물이 귀한 겨울철부터 봄까지이다. 찌개이건 국이건 호박말랭이 한 줌을 넣어서 끓이면 그 자체로 작품이 된다. 어찌 그리 질리지 않는 달콤한 맛을 내는지... 하긴 이것을 물에 살짝 불린 후에 무쳐먹어도 댓길이다. 대보름에 오곡밥과 함께 먹는 단골메뉴이고 또 가끔은 시루떡에 들어가서 맛을 내주기도 하는 보배같은 먹거리다.

또 하나 내가 좋아하는 호박요리는 호박전인데, 밀가루를 살짝 입혀서 기름에 조글조글 부쳐낸 호박전을 간장에 살짝 찍어서 먹을 때의 그 맛은 다른 반찬의 존재 자체를 잊게 만들만큼 맛들어진 음식이다.

하긴 늙은 호박은 애호박보다 더 쓰임새가 많다. 어릴 때 문고리 잡고 애를 낳았던 우리 어머님네의 산후조리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늙은 호박이었고, 주전부리 흔치 않던 시골에서 겨울철 달디단 호박죽 한 그릇은 추억이 녹아있는 간식거리였다.

그 뿐이랴. 울릉도 호박엿이 유명한 것처럼 호박은 그 단맛을 짜고 짜내어 엿이나 조청의 재료로도 쓰였고, 그 안에 켜켜이 들어있는 호박씨는 한 겨울밤 가족들이 둘러앉아 심심찮은 이야기 꽃을 피울 때 꼭 필요한 촉매제였던 것이다.

본체인 호박의 쓰임새는 이 정도로도 충분히 그 효용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텐데... 사실 나머지도 전혀 버릴 것이 하나 없는 것이 호박이다.

먼저 호박잎... 어머님은 여름철이면 밥을 뜸 들이기 전에 깨끗이 씻은 호박잎 한 주먹을 밥위에 얹어두곤 하셨는데 나는 유독 이 호박잎에 밥을 싸먹는 것을 좋아했다. 별 맛을 느낄 수는 없지만 그 까끌까끌한 감촉과 은은한 호박잎의 향취는 밥, 그리고 된장의 맛과 가장 잘 어울리는 쌈의 재료였다.

그리고 호박꽃... 다른 꽃들에 비해서 약간 덩치가 크고 별모양을 하고 있긴 하지만 노란색으로 좀 단조로운 느낌의 이꽃이 사실은 주변에서 벌들을 가장 많이 끌어 들이는 그야말로 꿀통이었다. 들키면 혼나긴 하지만 호박꽃을 따서 꽃잎과 꽃술을 다 따내고 꽃받침을 살짝 벌린 다음 입술로 핥으면 족히 내 혀를 천상의 맛으로 떨게 해 줄 만큼의 충분한 꿀맛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무엇인가 맛있는 것을 '꿀맛'이라고 하는 것은 이 맛을 빗댄 것이 아닌가 싶다.

호박꽃의 또 다른 쓰임새는 호박등불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호박꽃이 필 무렵이면 반딧불이가 많이 날아 다닌다. 반딧불이를 여러마리 잡아서 이 노오란 호박꽃에 넣고 주둥이를 봉하면 마치 등불처럼 주위를 환하게(약간 과장ㅎㅎ) 밝혀주곤 했다.

그리고 호박잎줄기... 이건 정말 환상적인 장난감이다. 호박잎을 따서 그 잎사귀부분을 제거하고 나면 속이 텅 빈 대궁이가 남는다. 대궁이의 한쪽은 조금 굵고 다른 쪽은 가느다란데, 이것을 몇 개 연결하면 훌륭한 파이프라인이 된다. 샘터에 한쪽 끝을 담그고 나머지는 소꼽장난을 하는 장소로 길게 연결을 한 후에 입을 대고 세게 빨아당기면 물이 이 호박 잎줄기 파이프를 타고 졸졸 나온다. 어린 시절 수도 구경을 하기 힘들었던 우리들에게는 정말 훌륭한 놀이감이었다.  그 물을 받아 세수도 하고 밥도 지으며 오손도손 재미있게 지냈던 기억이 새롭다.

호박의 이런 여러가지 쓰임새로 인하여 내가 살던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조금이라도 공터가 있으면 무조건 호박을 심었다. 다른 작물들에 비해서 손도 덜 가고 병충해도 적어서 심어두기만 하면 거의 100퍼센트 수확을 기대할 수 있었던 호박. 너무 흔해서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했지만 언제라도 기꺼이 음식으로 약으로 장난감으로 내 어린시절을 함께 해 주었던 고마운 존재였다.

그래서 가끔 호박에 대해서 이런 말도 있잖은가?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