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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수의 일상사

090506 청보리 푸르른 봄날에...

by 무딘펜 2009. 5. 6.

요즘은 보리도 화초처럼 가꾸어지나보다. 사무실 건물 앞에 놓인 커다란 프라스틱 화분에 짙푸른 보리가 심어져 있더니 어느새 부풀부풀한 이삭이 나오기 시작한다.

만화방창하여 유난히 아름다운 계절인 봄의 가운데에서 화려한 꽃들보다 샛푸른 보리이삭에 눈길이 가는 것은 나 역시 그 처럼 파란 꿈을 꾸던 어린시절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니 어쩌면 -멋내지 않고 솔직히 말한다면 - 그보다 그 시절의 배고픔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듯이 이맘 때 쯤이면 곡기가 섞인 양식은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이제 보리가 빨리 자라서 굶주림을 달래 주기만을 기다리는 배고픈 시절이다. 물론 향그런 봄나물들이 입맛을 돋구어 준다고는 하지만 그 돋구인 입맛을 무엇으로 채울꼬! 맨날 나물만 뜯어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나의 시골마을에서도 사실 몇 몇 부농을 제외하고는 이 시절에는 몇 년 묵은 정부미로 식솔들의 배를 겨우겨우 채워가는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혹자는 마치 프랑스 왕녀의 말처럼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된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내 어린시절에는 밀가루조차도 귀하고 고기란 놈은 1년 중에 제사 때에 몇 숟가락의 국물맛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맹세컨대 나는 대학교 이전에 고기를 구워먹어본 적은 없다. 고기의 요리법은 반드시 국을 끓여서 먹는 한 가지 밖에 없는 걸로 생각했었다.

갑자기 먹는 문제로 얘기가 심각하게 돌아갔는데... 사실 그 배고픈 시절에 보리는 희망이었고 지고의 아름다움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키가 쑥쑥자라는 보리싹이 대견스러웠고, 요즘처럼 보리이삭이 피기라도 하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주린 뱃속이 흐믓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계절이면 특히 종달새들이 보리밭에 많았다. 그 맑고 톤 높은 종다리의 지저귐과 따뜻한 봄 햇살, 그리고 세상을 온통 가득 메운듯한 푸르른 보리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봄날의 아릿한 행복감으로 온 몸이 근질근질한 느낌이었다. 

이제 한달정도 지나면 초여름 더운 바람에 추슬려서 보리이삭이 조금 더 피어 오르고, 이삭이 조금 통통한 느낌이 들면 등하교길에 주위를 살피고 나서 얼른 보리이삭을 똑 꺾어서 겉껍질을 까서 보리알을 입안에 톡 털어넣는다. 아! 그 파아란 보리알 속에 든 아린 맛과 푸르스름한 그 향은 세상 그 어느 진수성찬에 비할까 싶다.

이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는 도시의 가장 중심에서 가장 도시적인 일을 하고 있다. 어찌어찌 시간 없단 핑계를 대다보니 벌써 시골마을의 보리밭을 못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래도 머리 속에 아지랑이처럼 아스라한 모습으로 파랗게 그려지는 보리밭의 이미지는 하루의 삶을 싱싱하게 물들여주고 있다. /끝.